사진이 담긴 조행기/만재-가거-추자-거문-제주 3. 2018년 만재도의 가을 ( 7 미터의 기적 ) by 찌매듭 2018. 10. 30. 또 한숨 자고 일어나니 노 선장의 아들은 여객선편으로 목포로 갔단다. 예배당에 예쁜 처자가 있기에 일을 팽겨 쳐 놓고 간 것이 아닐까?! 여객선에 보낼 짐을 실어주고 들어온 아저씨가 늦은 점심을 먹고 급히 내려갔다. 오늘은 날씨가 좀 좋아졌기에 일찍 나가서 자리를 골라잡을까 했더니 안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잔파도가 일렁이고 있었고 바람도 거센 편이었다. “오늘은 어디로 갈라?????? ” “잔잔하고 조용한데로 가지요?!” 오늘은 가볼 수 있을까 생각했던 멀리 보이는 부속 섬의 갯바위에 흰 포말이 부서지는 것이 언뜻 보였기에 그 건너편이야 바람과 파도가 더 들어오겠고 노 선장도 고생하겠으니 가까운 곳으로 가봐야겠다. 아침에 몇 사람이 수면이 안쪽에 모여 있던 것을 보았는데 진도에서 온 하루치기 손님들이었기에 밤만 지새고는 일찍 나갔다는데 오늘, 가장 잔잔할 곳이기에 그 쪽을 쳐다보니 노 선장이 눈치를 채고는 “오늘은 저 곳이 가장 좋을 곳 같소~! 안쪽에는 우럭과 볼락도 낚일게고 참돔도 붙으면 큰놈이 붙는 곳이니 가봅시다~!“ 누군가가 아침까지 있다가 갔다는데 낚시를 안 하고 놀았는지, 제대로 된 수준급의 낚시꾼이었는지 흘린 밑밥도 별로 없이 깨끗했으니 양반집 사람들이 분명한 것 같았다. 수온이 약간 올랐다면 굴 안쪽으로 숨어 버렸을 돌돔들이 아침에는 언젠가와 같이 떼거리로 몰려나와 낚여 줄 수도 있겠다는 기대도 있었고 여섯 번이나 내려 보았던 익숙한 곳이기도 하니 틀렸다 싶으면 편히 누울 곳도 많은 곳이니 잠을 조금 자두면 내일 올라가는 길도 편하지 않겠어?! 이곳이 처음일 박 군은 지형 정찰을 하려는지 위에까지 올라가 둘러보고 있었지만 좋은 곳이 보인다 해도 밤을 지새울 날씨는 아니다 보니 얼른 내려 와야 할게다....... 노 선장의 말을 귀담아 들었는지 반찬고기라도 많이 낚아가려고 안쪽의 물속이 기우는 곳으로 박 군이 자리를 잡았고, 내심 아침의 돌돔 타임을 기대하면서 발밑에 패인 곳이 있는 굴 앞으로 자리를 잡고서 건너편의 물골을 따라 움직일 참돔을 낚아 보려고 3호찌와 5호찌로 채비를 두벌이나 차려놨다……. 어두워진 발밑에서 만만한 크기의 우럭과 쏨뱅이가 낚이기 시작했기에 좀 더 빠르게 쿨러백을 채우려면 장대가 빠르겠기에 몇 미터짜리를 사용할까 망설이다가 6 미터짜리를 사용하면 편하고 쉽겠지만 좀 더 밑으로 내려가야만 넉넉하게 거리가 나오겠기에 귀찮기도 하고 아직 물이 가득 차오를 시간도 남았고, 마구 들어 올리려면 조금 이라도 튼실한 것이 낫겠기에 6미터 장대를 밀어놓고, 7미터 장대를 뽑아 들었다. 발밑낚시가 잘 듣는 만재 도에서는 무겁고 힘들게 긴 장대를 사용할 것도 없는 것이 그라스롯드 재질의 장대를 들고 낚시를 하던 초기에는 팔뚝만큼한 굵기의 낚싯대에 치여서 고기를 잡기는커녕 사람부터 잡힐 판국이라 점점 줄여나가다가 은성사의 8미터짜리 조조라는 장대로 몇 단계 낮춰 잡았는데 뒤로 물러앉아서도 고기가 잘 낚이기에 오래도록 사용하다가 오동여가 건너다보이는 내마 도에서 한 밤중에 어떤 고기가 받침대까지 뽑아놓고 끌고 가는 바람에 멍하니 바라보다가 카본대가 나오면서 날씬한 7미터짜리 감성돔용 장대로 바꿔서 사용하게 되었다. 마음에 들고 애착이 가는 낚싯대에는 고기도 잘 낚이는지라 한동안 애용하게 되었는데 남대문 위쪽의 째진 골에서 밤낚시를 하다가 피곤하여 잠시 누워 잠이 들었던 날 날이 밝아 깨어보니 받침대는 있는데 낚싯대가 없어졌다. 걷어 놓고 있었으니 고기가 물고 끌고 갔을 리는 없고, 누가 몰래 훔쳐갈 수도 없는 곳이었기에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머리털이 곤두섰다. 근처에 놓아둔 소품통도 없어졌고 쿨러 두개도 없어졌다. 옆의 째진 골속으로 누가 집어 던졌는지 쿨러들이 처박혀 있었고 몇 번이고 흔들어서야 힘들게 빼낼 수가 있었는데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갯바위의 젖은 상태를 보고야 정신없이 잠이 든 사이에 다가 온 것이 사람이나 도깨비가 아니라 너울의 짓이 분명했다. 가벼운 소품 통은 쓸려 나갔을 것이고 받침대에 걸어둔 낚싯대를 개구리 벌레 잡아채듯이 너울이 말아갔을 것이고 쿨러는 너울에 떠올랐다가 골짜기에 쳐 박혀 버렸을 것으로 생각되니 불과 반발거리로 누워있던 발밑까지 쓸고 갔던 것이 분명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저 아래에 멎어 있는 수면을 보니 위험했던 순간이 상상이 갔고 그 이후로는 철저하게 물이 고여 있는 곳의 한참 위로 짐을 올려놓고 퇴로를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나 보다....... 언젠가는 외마도의 아래쪽에 일행들과 함께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고인물이며 오랜 세월에 걸쳐서 파도가 쓸어내린 물로 미끄럼틀 같이 변했을 장소가 영, 껄꺼름했다. 좀 더 옆으로 자리를 옮겨볼까 둘러보다가 마땅한 자리가 있기에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니 이 더운 여름에 많은 짐을 힘들게 왜 옮기냐며 거부하기에 내가 좀 더 많은 짐을 옮길 테니 거들어만 달라고 해도 들은 척을 안했다. 한 사람은 그럴까 했지만 한 사람은 고기가 안 잡혀도 옮기지를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기에 혼자서 먼저 짐을 옮겨 보기로 하고 여러 개의 짐을 날랐고 밑밥통 하나만을 남겨 놓고 허리를 펴는 순간, 어디서 다가온 너울이 갑작이 쓸고 나가기에 손을 뻗쳐서 움켜잡았는데 옆에서 악을 쓰는 소리가 들렸기에 돌아보니 두 명이 있는 자리에는 너울이 위에서 내려치고 있었다. 쿨러며 온갖 짐덩이들이 물위에 둥실 떠서 흘러 내려가고 있었기에 이것들도 쓸려 나갔겠구나……. 급히 달려가 보니 양손으로 갯바위를 꼭, 움켜쥐었는지 사람만은 다행히 쓸려 나가지를 않았는데 전화도 안 되는 시절이었기에 건너편에 있던 사람들에게 악을 쓰다가 호루라기를 불어서 손짓을 하니 알아들었는지 안쪽에서 그물 손질을 하고 있던 배에게 소리를 쳤고 그때만 해도 젊었던 노 선장과 아저씨가 달려와서 갈고리로 떠다니는 짐들을 건져냈고 밑밥통 하나만 물속으로 가라앉았는지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사진이 취미였던 일행은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카메라는 찾았지만 소금물에 염장을 했으니 마음속도 염장 질을 당했던가 보다..... 가방을 열어보니 기가 막힐 지경이라 민물에 담가야겠다며 낚시를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렸고 남은 한 사람은 체격이 나와 비슷했기에 여벌로 있던 내 옷으로 갈아입고 밤낚시를 하겠다고 남았는데 한번 놀란 가슴이니 그 자리보다 좀 더 안전해 보이는 다른 장소로 이동하여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차라리 집으로 들어가서 놀란 가슴도 진정하고 쉬어야 했는데 그대로 낚시를 한 행동은 용감했다기 보다는 무모한 짓이 분명했을 텐데...... 7미터가 약간 넘는 잃어버린 장대는 귀신이 들렸는지 오래도록 많은 고기를 낚아 주었는데 상태도의 슬픈 여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큰 농어가 걸렸는데도 잘도 버텨주어 끌어내었고 원줄이 8 호줄 이었는데도 밤새도록 사십에 가까운 볼락들이 쿨러가 넘치도록 물어 주어 밤을 꼬박 새우게 되었는데 같이 낚시를 하던 볼락마니아는 앓는 소리를 냈다. “아니야……. 이건……. 볼락이 얼마나 예민한데 8 호줄에 농어바늘이라니……. 말도 안 돼....” “안되긴 뭐가 안 돼? 줄이 굵거나 말거나, 바늘이 크거나 말거나, 봐? 되잖아? 된 다구?! 되고 있잖아?! “ 날이 밝아서 낚시가 끝난 것이 아니라 미끼용 지렁이가 떨어졌고 더 이상 담을 곳도 없기 때문이었는데 낚시를 끝내고 낚싯대를 걷고 짐도 일찍 꾸려놓고 배를 기다리다가 발밑을 보니 미역이 우거진 사이로 번뜩이며 돌아다니는 것이 돌돔이 분명했다. 흩어져 떨어져 있는 크릴을 주워서 톡~! 하니 던져보니 덥석, 받아먹는 것이 겁이 없었고, 어항에서 기르는 관상어 같기도 했는데 발밑이다 보니 7미터짜리 장대를 당겨 세워서 물에 담그기만 하면 솟구쳐 올라와서 널어진 주워 끼운 크릴을 물고 늘어 졌는데 짧은 장대가 있으면 편할 것 같았다. 그 다음번에 낚시를 갈 적부터는 소양댐으로 향어낚시를 다니면서 사용하던 5미터짜리 장대를 가져가게 되었는데 태도며, 가거 도며 만재 도에 가서 사용해 보니 반찬고기 잡기에는 아주 편한지라 예비용으로 두 대를 가지고 다닌 게 된 것이 구십년도 중반부터였다. 그때만 해도 고기는 더 많았을 테고 손을 타지 않은 곳이 많았을 때라 그랬을까?! 가끔씩 큰 고기가 덤벼들어 감당이 안 되기도 하기에 어느 정도의 큰 고기까지 감당할 수 있을 낚싯대를 찾다보니 튼튼한 낚싯대는 길이가 긴 것뿐이었으니 너무 무거워서 마음에 들지를 않았다. 길게만 나오는 돌돔용 장대를 뒷토막 몇 개를 덜어내고 손잡이부분을 손질하여 7미터 정도로 줄여서 사용해보니 투박하여 손재미가 없기에 집근처에 있는 낚시점에 가서 가장 짧은 돌돔용 낚싯대가 없을 까고 알아보니 어느 회사에서만 6미터부터 제품이 나오는데 이렇게 짧은 장대로 무슨 돌돔을 잡겠느냐며 머리를 흔들었다. 6 미터자리와 조금 더 긴 7 미터짜리까지 두 대를 구입하여 만약에 하나를 분질러 먹으면 부품을 교체하여 바로 사용할 수 있겠기에 십 년 전부터는 가방 안에 꼭 가지고 다니고 있었다. 이름이 또 얼마나 예쁜지 이름도 아름다워 해금강이란다. 자리 잡는 곳마다 매번 사용할 수 없는 제약이 있긴 했지만 만재도 에서라면 발밑 수심만 어느 정도 나오면 사용에 불편이 없었기에 국도 어느 자리에서 멀거니 쳐다보는 서 씨 아저씨에게 한대를 건네주니 반찬거리 수십 마리를 순식간에 잡았는데 나중에 그 낚싯대를 샀는지 안 샀는지 모르겠는데 아직도 쿨러를 쉽게 못 채우는 것을 보면 분명히 안 샀겠지????? 갯바위에 내리면 먼저, 밑밥 한 덩이를 내놓고 다른 준비를 하고나면 약간 녹은 것을 손으로 훑어내어 좋은 것 몇 마리는 바늘에 끼우고, 남은 것을 퇴~! 하니 밑밥으로 뿌리면 어렵지 않게 고기를 낚을 수 있는 곳이 만재도이기에 낚시를 하려고 내리는 자리에서는 장대를 먼저 펼치는 것이 습관처럼 되었다. 6미터짜리 장대로 45짜리 돌돔을 끌어내었지만 그 이상은 버팀이 안 되는지 손잡이까지 꺾어지면 낚싯대의 상표가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기에 감당이 안 되었고 7미터짜리로는 48자리 돌돔이 너끈히 끌려 나오기에 자리 잡은 장소에 따라 길고 짧음을 골라야했는데 외마도 쪽의 중간자리에서는 위쪽 자리에서는 6미터짜리로도 돌돔이 마릿수로 낚였지만 약간 아래쪽에서는 7 미터 짜리여야만 고기가 물어 주었으니 물속에도 길이 별도로 있는가보다. 어두워지기 시작하면서 우럭들이 입질을 하기 시작했고 어둠이 깔린 먼 수평선에는 수많은 어선의 불빛이 밤바다를 수놓고 있었다. 곧,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중들물 시간이 되었기에 찌낚시를 걸쳐놓고 7 미터 장대에만 집중을 하고 있었는데 예민하게 내려가는 입질이 돌돔 같았기에 미리 손을 대고 있다가 맞추어서 챔질을 했는데 우악스런 당김에 두 손으로 낚싯대를 움켜잡고 겨루다가 왼쪽으로 끌고 가면서 낚싯대가 튀어 올라왔다. 바늘 위 한 뼘쯤에서 쓸림이 있었는지 끊기어져 나갔는데 얼른 손으로 밑밥 몇 주먹을 던져 주고 새로 채비를 했다. 돌돔용으로는 크기가 가장 알맞은 감성돔용으로 나오는 6호 바늘은 너무 입속으로 깊이 박히지도 않고 미끼도 풍성하게 끼울 수가 있기에 애용하면서 수십 개를 갖고 다니는데 3호 바늘로도 육짜 감성돔을 잡는데 6호라면 당연히 구짜도 낚을 수가 있지 않겠어?! 처음에는 머리를 흔들던 아저씨도, 노 선장의아들도 이제는 6호 바늘 마니아가 됐다. 예전에 당신들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갈고리만한 바늘로 고기를 잡지 않았다니 맞는 말이라며 4호 크기의 감성돔 바늘로 겨울 낚시를 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나를 따라서 깐 새우를 통째로 팍팍 끼울 수 있는 푸른색의 6호 바늘만 찾는다……. 분명히 우럭이 아닌 다른 고기의 입질인데 겁 없는 돌돔이라면 계속 흩뿌려준 밑밥에 떠나지를 않았을 것 같아 아예 받침대에 낚싯대를 걸지를 않고 잠시 쥐고 있기로 했다. 또 한 번 무겁게 내리꽂히는 낚싯대의 끝을 보면서 챔질에 들어갔고 굉음을 내면서 알 수없는 크기의 고기가 힘을 쓰기 시작했는데 낚싯대가 부러지던, 줄이 터지던, 바늘이 부러지던 간에 결단을 내야했다. 좀 전에 쓸려나갔던 왼쪽으로 고기가 달리기에 팔을 있는 데로 올리면서 머리를 돌리려고 안간힘을 썼고 내리 꽂히면 또 당기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정도 고기가 힘이 빠졌다는 생각에 혼자 떠낼까 하다가 찌낚싯대가 아닌 장대다 보니 발밑까지 당겨내며 직접 뜰채가 안 닿겠기에 박 군에게 뜰채 질을 도와줘야겠다고 소리를 쳤더니 바로 달려와서 대물과의 겨룸을 지켜보았는데 한참 만에 고기가 떠오르는 것이 불빛에 언뜻 보였는데 큰 돌돔이라고 생각했었기에 누런빛이 좀 의아했다. 내려다보던 박 군이 참돔이라고 하기에 일단 물위로 띄웠으니 어렵지 않게 되었다. 박 군의 뜰채는 약간 작고, 휘청거리는 것이기에 옆에 있던 내 뜰채를 건네주었지만 뜰채가 들어가질 않는다기에 완전히 힘을 뺄 테니 천천히 머리부터 집어넣으면 아무리 큰 것이라도 들어간다며 고기의 머리를 들어 주었는데 반쯤 뽑혀진 뜰채의 중간부분을 잡고 휘어진 채로 떠내려하기에 다시 접어 넣고 손잡이 부분을 잡고는 처음부터 디시 떠보라 했더니 고기가 들어갔는지 이번에는 뜰채의 휘어진 중간 부분을 들고 올리려고 했다. 그리하면 안 되니 내려가서 뜰채의 후래임을 움켜쥐라고 소리를 쳤고 몇 번의 잔소리 끝에 뜰채에 담아들고 올라왔는데 그러고 보니 박 군은 이렇게 큰 고기도 처음 보거니와 뜰채를 사용한 것도 처음이겠으니 몹시 당황했던가보다……. 계획된 방송의 연출도 아닌 생생한 모습으로 고기와의 다툼과 올림까지를 볼 수가 있었고 뜰채까지 사용해 보았으니 다음번의 낚시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대충 눈짐작으로도 팔십을 훌쩍 넘기고 구십에 가까운 참돔의 입술에는 파란 6호 바늘이 박혀 있었다. 쿨러백을 단번에 가득채운 큰 고기로 먼저 잡은 고기들이 깔려서 가려져 버리며 무거워져 버렸는데 큰 고기가 휘저은 탓에 오래도록 발밑에서는 입질이 끊어져 버렸기에 뒤편으로 넘어가서 찌낚시를 해보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이 서늘했고 농어는 그림자도 보이지를 않았다. 아직 만조며 물돌이 시간까지는 아직 두 시간이나 남았으니 낚시를 더 해야 했기에 찌낚시 쪽으로 집중해서 이런저런 고기를 몇 마리 더 낚아봤지만 낚시가 그만, 시들해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 저녁밥을 안 먹었군?! 박 군이 장만해 온 양념 고기 한 덩이가 더 있다니 박 군에게는 낚시를 하라하고 내가 코펠에 고기를 볶아서 늦은 저녁밥을 먹게 되었는데 밥이 하나뿐이었다. 꼭꼭 눌러 담은 것을 보니 라면을 끓여서 함께 먹으라고 한 모양인데 부족하지 않았다. 내일은 서울로 올라가는 날인데 배안에서 잠들기가 쉽지가 않으니 편한 곳을 찾아 잠시 눈을 붙이려니 모기가 덤벼들기에 작은 텐트를 꿈지럭거리면서 펼쳐놓고 두어 시간 동안 단잠에 빠졌다가 맞춰놓은 알람 소리를 두 번 놓치고서야 텐트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밤을 꼬박 새운 박 군은 쿨러 백이 넘치도록 온갖 고기를 낚았다는데 오짜급 참돔도 여럿 있었다니 고기가 움직이는 날이었다. 갯바위 한구석에 쓰레기가 덩이져 있었는데 어제 다녀간 사람들이 버리고 간 것 같은데 양반집 사람들이 아닌 것은 분명했고 가정교육도 제대로 안됐을 게고 콘덴싱 같은 건 사용하지도 못할 수준과 형편일 것이 분명했다. 쓰레기를 한참 치웠다고 하면 아줌마는 불 같이 화를 냈다. “우리도 쓰레기를 버리고 나오지 뭣허러 가지고 나왔소?! 다음에 그 사람들이 와서 지저분한걸 알아야 양심이 있으면 또 안버리겠지라...“ 팔십종수(八十種樹)라는 말이 있다. 나이가 팔십이 되어서 나무를 심으면 그 나무가 자라는 것도 볼 수가 없고 그 나무의 열매도 거둘 수가 없기에 너무 늦게 나무를 심으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씨 뿌리기' 라는 박목월 선생의 수필에는 호주머니에 은행과 호두열매를 넣고 다니며 학교의 빈터와 뒷산에 열매종자를 심는 노교수 이야기가 나온다. 옆에서 본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나중에 은행나무가 우거지면 좋을 것 같아서 심는다고 했다. 교수님의 연세가 있는데 그 나무가 언제 자라서 열매까지 달리는 것을 보겠느냐고 웃자 "누구든 다 사람들이 얻을 열매" 라고 대답했다. 오랜 후에 그 학교를 다시 찾았을 때 어른 키만큼 자란 은행나무와 자란 호두나무가 있었다. 홍익대학교의 빈터에 아직도 그때 그 나무가 남아 있다면 지금은 큰 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옛말에 "예순에는 나무를 심지 않는다(六十不種樹)"고 했다. 심어봤자 그 열매나 재목은 못 보겠기에 하는 말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이었던 송유(宋兪)가 70세 때 생일잔치를 했는데 귀한 귤 열매를 선물로 받고 그 씨를 거두어 두었다가 심었다. 주위의 사람들이 속으로 웃었다. 그 후에 10년을 세월이 흘러서 그 귤나무에 달린 열매를 따 먹게 되었고 또 10년을 더 살다 세상을 떠났다. 조선 중기인 인조 때의 문신 황흠(黃欽)이 80세에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와서 사람을 시켜 밤나무를 심게 했다. 여든이 넘었는데 너무 늦게 무슨 짓일 까고 이를 본 사람들이 웃었다. 황흠은 자손에게 남겨 줄 텐데 무슨 상관이 있는가 했고 10년 뒤에도 심은 밤나무에 밤송이가 달리자 이웃들을 불렀다.. "자네들 이 밤 맛 좀 보게나. 후손을 위해 한 일이 날 위한 것이 되어 버렸군." 조선 시대의 문신이었던 홍언필(洪彦弼)의 아내가 평양에 세 번을 갔다. 어려서는 평양 감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갔고, 두 번째는 남편을 따라 갔으며, 세 번째는 관직에 오른 아들을 따라 갔다. 처음 갔을 때 장난삼아 감영에 배를 심었고, 두 번째 갔을 때는 그 열매를 따 먹었다. 세 번째 갔을 때는 재목으로 베어 다리를 만들어 놓고 돌아왔다. 세 이야기 모두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였던 심재가 아름답고 배울 이야기들을 듣고 본대로 정리하여 기록한 ‘송천필담(松泉筆譚)'에 나온다. 너무 늦은 때는 없다. 예전에는 나이 육십이 되면 환갑잔치를 벌렸고 노인 행세를 하며 책도 안 읽고 공부도 놓고, 일도 안 하면서 적당히 살면서 죽을 날을 기다렸다. 얼마 후부터는 칠십이 되면 잔치를 하기도 했지만 세상이 바뀐 지금에는 가족끼리 팔순잔치도 조용히 하는 세상이 됐다. 자주 가는 갈치낚시 배를 타보면 주위의 노 조사들은 가거도를 다니던 새마을호 이야기를 한다. 귀를 기울여 듣다보면 믿기지 않는 이야기도 하는데 의자에 앉아서 고기가 걸렸는데도 전동 릴을 감을 생각을 안하기에 왜, 가만히 계시냐고 하니 힘이 들어서 그런다기에 대신 감아 올려주었고 고맙다는 인사에 연세가 많으신 것같다고 하니 여든 셋이라고 했다. 바다낚시의 꽃은 갯바위 낚시라는데 바다낚시의 끝판왕은 갈치낚시라고 하던가?! 나에게는 아직 파워플하긴 하다만 어쩌면 코끼리 무덤 같다는 생각도 드니 별일이다. 우리의 선임자들은 교통편도 열악하고 모든 것이 불편한 시대에 추자도며 거문도며 가거도 같이 멀고 먼 섬을 찾아서 온갖 고생을 하면서 길을 만들어 놓고 포인트를 개척 했었기에 지금 우리들이 편히 다닐 수가 있게 되었다. 천자조법이 무슨 소용이 있고 복잡한 기법들이며 조류가 복잡한 곳까지 억지로 채비를 흘려서 고기를 속여 잡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요즘 유행하는 낚시 방송을 보면 얼떨한 연예인이 더 고기를 많이 잡던데 용왕님이나 찾으면서 바늘에 미끼를 끼워서 기다리다 보면 고기는 잡히게 되어있고 빈 바늘에도 물어주는 운도 있어야 한다. 갯바위며 바다는 내가 낚시를 하는 주변만 깨끗하게 사용한다면 더러워질 까닭이 없다. 떠나려는 날은 항상 날이 좋으니 어찌된 일일까?! 노 선장이 어제보다 늦게 왔는데 아침타임을 즐기라고 한걸 까? 이미 낚을 만큼 고기를 낚았고 짐을 꾸려 놓았지만 아쉬움이 남았던 박 군은 물 흐름이 맞을 뒤편에서 잠시 낚시를 하다가 넘어 오면서 줄까지 가져가는 큰 입질이 있었다며 아쉬워했는데 아침 참돔이 있었던가보다. 큰 고기가 붙는 시간이 정확한 곳이라며 조과가 어떠했는가를 물어온 노 선장이 흐뭇한 웃음을 얼굴에 떠올렸는데 짐작을 하는 가보다……. 펜션을 맡아 하는 여수 아저씨가 아침낚시를 하고 있었는데 겨울철에는 감성돔이 곧 잘 붙는 넙적 바위 앞에서 막대찌가 기울어지도록 솟궈놓았는데 다른 곳이라면 너무 올려놓았다며 난리를 치겠지만 여기는 만재도가 아니던가?! “와~~~!!!! 저 고기를 어찌 낚아 올렸을까?!” 고기 손질을 하던 섬사람들이 소리를 질렀고 고기를 다는 저울위에 참돔을 올려놓아보니 7키로가 되니 이래저래 7미터의 기적이 있었나보다. 큰 고기를 손질하는 영광을 아줌마에게 돌리겠다며 슬쩍 밀어주니 비늘을 쳐달라기에 사방에 튀겨가면서 씩닥였는데 빠른 동작으로 손질을 끝낸 아줌마가 그릇에 담아 들고는 어디론가 달려갔다. “어디로 갖고 가는 거요????? ” “얼렁, 냉동고에 넣어야 몸땡이가 식어서 서울 갖고 가지라?!” “역시, 아줌마는 무엇이든 척척박사요~~~~!!!!!! ” 만재도 에서의 마지막 끼니를 함께 하겠다고 일손을 잠시 놓고 올라온 아저씨가 어딘가에 감춰놓았던 백세 주 한 병을 꺼내왔고 함께 마주앉아 식사도 못하고 술 한 잔도 못했는데 일이 바빠서 그러니 이해하라면서 석 잔을 연거푸 따라 주었다. “감성돔 철에 오면 그때는 내가 같이 낚시도 하고 고기도 낚아 회도 한 점하면서 이야기도 나눌 테니 용서하소~~~!!!! “ 지금까지의 오랜 만남이 또 오래도록 이어지기를 기원한다면서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식사가 끝나자 잠시 쉬라하곤 낚은 고기들을 담아놓겠다며 먼저 내려갔는데 집에 올려 둔 비어진 쿨러에 담으면 짐 덩이가 하나 더 줄겠기에 따라 내려갔다. 못 보던 낚시꾼 하나가 여객선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삼 일간 신여에서 나오지도 않고 야영낚시를 했다니 대단한 사람이다. 열기 떼가 붙어서 정신이 없었다는데 임 선장이 빈 배로 오간 것이 도시락을 전해주러 갔었던 게로군?! 바퀴가 달린 갈치 쿨러에는 몸체가 휘어진 참돔이 담겨 있었는데 혼자서 끌어내려면 힘 좀 들었겠다. 시간을 맞추어 정확하게 도착한 여객선에서는 내리는 사람도 없었기에 지체가 없었고 다른 날보다 흑산도의 관광객도 적었기에 목포항 도착도 이른 편이었다.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던 노 선장의 아들이 짐을 받아 주었고 저녁식사를 하고 올라가시라고 꽃게 살로 만든 비빔밥집으로 안내하여 간재미 무침과 함께 과식을 했으니 올라가는 길에 졸음이 오면 어쩔까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자정쯤에는 도착을 했으니 늦지는 않은 편이었다. 큰 고기를 낚으면 처치도 곤란할 때가 있는데 식구 많고 먹성 좋고 조리도 잘하여 맛있게 먹어주는 친구가 집근처에 살고 있다. 낚시를 갈라치면 쿠키며, 여러 가지 간식을 때마다 챙겨 보내기에 서로가 잊지 않고 지내는데 자정에 도착하여 고기박스를 던져주고 집에 도착하여 짐을 내리는데 전화가 왔다……. “ 와~!!! 지난번에 것과 비슷한 참돔인데 줄자로 대충 재니 85센티쯤 나오네?! 비늘치고 배 갈라서 냉동고에 넣었다가 가져왔다니 마르고 약간 줄었겠는데 갓 잡았을 때는 더 컸겠는걸??? 어떻게 해먹을지 궁리를 한참 해야겠어.!!! “ 급한 짐만 대충 정리하곤 무심한척 하지만 반가워해주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니 정말 내가 먼 길을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물 칠만 하고 누움을 모른 체 넘어가 주니 고마울 뿐이다. 내일은 노모가 계신 곳에 가서 먼 길을 안 다녀온 척 시치미를 떼야한다. 곧 잠이 쏟아지겠지……. 공유하기 게시글 관리 낚시의 덫 저작자표시 비영리 변경금지 '사진이 담긴 조행기 > 만재-가거-추자-거문-제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듀~ 2018년 만재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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