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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담긴 조행기/만재-가거-추자-거문-제주

아듀 2012년 만재도 1. (또 한 번 어부가 되어......)

by 찌매듭 2012. 12. 29.
아차차……. 너무 의사의 말만 믿었나보다…….
구월 중순경에, 찬바람이 나면 2차 눈 수술을 하자는 것이 1주일이면 충분하니
퇴원해서 일상으로 복귀하여 추석일정도 볼 수 있다했으니
시월초면 돌돔도 곧잘 나오는 철이니 밤낚시의 진수도 느낄 수 있겠기에
혼 쾌히 수술대위에 올라 다시 한 번 속눈썹을 깎아내게 되었는데 어째,
눈앞으로 다가오는 마취약이 담겼다는 주사기가 첫 번째 수술 때보다 더 커진 것 같았다.  
“잠간만~!!!!!!!! 어째, 전번보다 주사기가 곱도 넘게 커지고 양도 많은 것 같은데 어쩐 일이죠?”  
지난번 보다 수술하고자 하는 부위가 더 깊은 곳에 있기에 마취제 양이 많아졌다나…….
가볍게 찔러대던 예전과 달리, 두 손으로 힘껏, 찌르면서 후벼 파듯, 너무 깊숙이 바늘이 
들어왔다는 생각과 이상스런 느낌의 통증에 나도 모르게 그만, 비명이 솟구쳐 나왔다........  
“아~~~~~~으~~~~~~~~, 사람 살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아프셨죠?????????”
(너라면 안 아플 리가 있겠니???? ㅠ ㅠ )  
오로지 갯바위에 올라 푸른 바다와 뻘그스름한 찌를 다시 봐야한다는 일념하나로
고통을 참아야한다는 다독임으로 두 시간 가량을 버텨야겠기에 열손가락으로 
옷깃을 움켜쥐었다 놓기를 반복하다보니 견딜만한 통증과 함께 신기한 현대의학의 현상이 펼쳐졌다.  
30분 정도의 1차 처리 후에 본격적인 수술을 시작한다는 멘트와 함께 눈 속으로 
쇠집게 같은 것이 들어오더니 눈 속에서 유영을 하듯 헤집고 다니며 실푸레기 같은 것을 
한동안 떼어내고 나서는 레이저 침이라는 꼬챙이가 재차 들어와서 이곳저곳을 
지져대기 시작하니 머릿속에서 천둥번개가 치는 듯 요란한 시간이 지나갔지만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아픔 속에서도 참으로, 현대의학이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급한 병중에서도 눈에 망막박리가 일어난다면 급히 24시간 내에 
전문병원으로 달려가 서둘러서 처치를 해야만 하는 위중한 상황이기에
먼 섬이나 벽지에서 이런 증상이 감지가 되면 헬기를 불러서라도 제시간 안에
병원에 가야 한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는데 다행히 집에 있을 때 발견이 되었으니 
이만저만한 큰 다행이요 행운이었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었다.

  
추석 전에 퇴원은 하게 되었다만 한동안 절대 안정을 취해야한다는 미쳐 생각지도 않은 
주의를 뒤늦게 내뱉는 의사를 잠시 째려보다가 할 수없이 가을바다를 그대로 머릿속에서 
지워야했는데 추석연휴의 연휴가 지나도록 업어져서 지내다 보니 심한 갑갑증에 
후배하나를 꼬드겨서 푸른 바닷물 못지않은 푸른 물이 담겨 있는 북한강의 댐으로 나서보았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낚시나 고기잡이에 무슨 큰 기술이 필요하겠나? 
생전에 내 몫으로 배당이 된 고기가 있다면 접시물속에서도 낚아낼 수가 있을 테고
전유동이며, 천자조법이고, 냉수대가 어쩌고, 최신병기가 어쩌고저쩌고, 
복잡한 와류 속을 뚫고 보이지도 않고, 실제로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물속의 숨은 여의 뒤로 채비를 살짝 넘겨 숨어 있지도 않는 가상의 고기 입 앞으로 
미끼달린 바늘을 보낸다는 말도 안 되는 황당할 낚시교실까지 가서 쓸데없는 공돈까지 
바칠 필요도 없이 그저, 때만 잘 맞추다보면 절로 고기가 입을 열고 달려와 
바늘에 설 달린 미끼라도 물어준다는 믿음으로 변하다보니 미련했던 예전의 수많았던
낚시행이 헛 발길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고 보니 황금가지가 주렁주렁 열리는 
복 많은 과부가 넘어진 포인트가 첫째요, 가고자하는 시간에 갈수 있음이 둘째요, 
복 받은 날씨가 그 세 번째라 굳게 믿는 편이다 보니 바늘크기가 어떻고, 목줄도 타면 
안되며, 해괴한 기법이나 기술은 순진한 꾼들을 농락하는 떼잡이들의 산물이 아닐까 모르겠다........  
북한강의 댐들도 마찬가지 일게다…….
수십 년간 물이 차고나기를 반복했던 물속지형까지 대충 기억해 두었던 곳이 생각났기에
호랑이가 출몰했다는 고개를 넘게 되었는데 벌써, 가을 분위기도 풍기기 시작했으니
수온이 더 내려가기 전에 그곳을 한번 가보아야겠기에 이미, 날이 훤하게 밝았지만 
경험만을 믿어 보기로 하고 북한강변에 도착하니 물수제비를 떠내는 듯한 라이징 현상이 
곳곳에 보였는데 쓰잘데기 없는 저급 어종인 배스낚시에 심취했던 후배는 자잘한 배스나 
브루길일게라며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70년대 초에, 그저, 양놈 것이라면 똥도 좋다는 생각에 어떤 미련한 놈이 주선을 하여
들여왔던 배스라는 고기를 팔당댐에서 처음 잡아보았었다. 아무 루어나 던지기만 하면 
물어대던 놈들이 점차 약아지기에 민물새우를 미끼로 또 얼마나 잡았었을까?! 
별로 먹을 만한 것도 못되었고 붕어의 찌 올림에만 심취해 있다 보니 친근감도 
생기지 않았는데 생태계 파괴의 주범으로 몰려 미운털만 박힌 어종이었다.   
강화도의 어류정 수로로 얼음낚시를 가보면 생각지도 않게 잡혀 나와 그 대단한 
번식력과 이동거리에 혀를 내두르기도 했는데 블루길이란 어종도 마찬가지였다…….
찌 올림이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진주남강댐으로 붕어낚시를 간 것이 
1972년의 가을이었을 게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물고기가 한 마리 낚여 올라왔기에 
손바닥위에 올려놓고 멀거니 들여다보고 있자니 옆에 함께했던 전직이 8군 요리사였던
선배가 블루길이라는 양놈 물고기라며 버터에 튀겨 먹으면 맛이 있다기에 코펠뚜껑에 
튀겨보았는데 탠탠한, 살점이 먹을 만은 했지만 자리돔만한 크기다 보니 마땅한 대상어가 아니었다.
나주댐을 가보니 현지인들은 월남붕어라고 부르며 반찬거리를 한다며 잡기도 했지만 
잉어나 메기 같은 어종이 많은 곳이었기에 눈에 들어 올 리가 없었다.  
오래전부터는 북한강의 파로호나 소양호에서도 배스나 블루길이 득실거리게 되었는데 
그저, 메기나 쏘가리가 노린내 나는 양놈어종들을 제압해주기를 바라기에 남들보다 
포획하는 쏘가리 크기에 넉넉하게 마음을 쓰는 수밖에…….
포인트에 대한 믿음이 물속까지 전달되었는지 넉넉한 쏘가리 구경에 후배 놈은 아예 
넋이 나가버린 상태로 눈이 충혈 되면서 거품까지 물어대더니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다소 난폭하고 교통질서를 위반하는 행동을 하더니 내짐을 내려주더니 제몫으로 건네받은 
열댓 마리의 굵직하고 실한 가을 쏘가리를 싣고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는데 어디로 자랑을 하러 가는 것일까?
가을바람도 쐬었겠다, 풍성한 수확도 있었겠다, 짐정리를 하려는데 지나가던
서 씨 아저씨가 들이닥쳐서는 당연히 먹을 것으로 여겼는지 ‘어디로 가서 먹을 것이냐’며 
침을 흘리면서 이리저리 연락을 하는 것이 먹을 복을 타고난 사람은 따로 있는가 보다…….  
낚아 온 것의 절반을 서 씨 아저씨에게 내줄 수밖에 없었지만 약속이 제대로
안되었기에 귀한 쏘가리회가 절반이나 남아돌아 천대를 받게 되었으니 다음부터는 
조용히 문을 닫고 진공 포장을 해 두었다가 겨울양식으로나 쓰고 볼일 아닐지 모르겠네.......

  

  
허무하게 시월이 지나가 버렸고 11월이 되자 주꾸미 잡이를 가자며 박 씨가 연락을 해왔다.
금년에는 참돔수확이 시원치 않았기에 오천의 김 선장이 연락을 안했을 게라 좋게, 생각하며
새벽길을 달려 오천 항에 도착하니 약간 늦은 시즌이었는데도 주꾸미 잡이를 온 사람들이 
많아 차를 세울만한 공간이 없었다. 불야성이라는 건 이런걸. 두고 하는 말일게다…….  
새벽의 간단한 식사거리로 잔치국수며 점심거리로 햄버거를 파는 노점상도 등장했는데 
어떻게 오천 항이 이렇게나 사람들이 몰리며 발전을 하게 되었을까?  
이십 년 전에 오천 항을 찾아 간 것이 외연도로 농어 잡이를 갈 수 있는 
배편이 있을까하여서였고 근처의 섬으로 밤 낚시꾼을 태워다주는 것도 눈치가 보여 
언덕너머 외딴곳에서 숨어 기다리고 있다간, 순사나리의 눈을 피하여 힘들게 배를 
타기도 했는데, 다음날 식사를 위하여서는 간판도 없는 허름한 식당을 찾아내어 억지로 
깔다구회라도 한 접시 시켜야만 공기 밥을 얹어 허기를 채울 수가 있었던 곳이었다.......  
곁두리로 동막 조개탕이 나와 신기하게 생각했었던 것이 6.25 사변 때 잠시 
머물러야했던 인천에서, 노모는 매일같이 조개반찬을 마련했었다고했다. 
지금이야 귀해진 백합이나 모시조개가 지천이었던 시절이었기에 물 빠진 갯벌에 널린 
동막 조개는 맛도 없는 하찮은 조개로 줍는 사람도 없었다는데 인천 앞바다가 서서히 
오염이 되면서 제대로 된(?) 고급조개부터 자취를 감추더니 남동공단이 들어서면서 부터는 
그 흔해빠졌던 동막 조개까지 사라져버렸기에 논현동의 고급포장마차나 조개구이집의 접시에도
 뻔뻔스럽게 끼어 올라오더니 급기야는 일식집의 국물받이로 등장하기에 이르렀는데 강남 촌사람들이 
조개 맛도 모르다 보니 서비스라며 동막 조개 몇 개를 얹어주면 감지덕지해 하는 촌극이 오늘밤도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을게다만…….  
지금도 동막 조개를 보면 젓가락으로 집어 들어서는 속도 발려먹지 않고 버리는 
못된 습관이 꼭, 노모 탓이라고 변명을 하기엔 이미, 조개 맛을 알아 버린 후다 보니 
후배들과의 술자리에서 “너희들이 조개 맛을 알아?!” 큰소리를 치다간 핀잔도 듣긴 한다만 
그래도 너희들이 피조개가 몸으로 울기도 한다는 진짜 조개 맛을 알기는 알까 모르겠다. 

 

   
오천항 입구에 있는 하나밖에 없었던 낚시점에는 그때로서는 고가일수밖에 없었던
농어용 루어가 통틀어서 열 개나 갖추어져있던 시절이었지만 제법 속도가 나는 배가 
한척 있었기에 그 배를 얻어 타고 외연도를 드나들며 셀 수도 없이 많은 농어자원에 
경악을 하게 되었지만 가파르게 선비도 오르기 시작했지만, 그보다는 외연도로 가기를 
어쩐 일인지 꺼리기 시작했는데 현지인과의 마찰이 더 큰 이유였다.  
외지에서 온 빠른 배가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면서 이상한 것을 던지더니 농어를 
마구 잡아가는데 처음에는 멀거니 바라보더니 남에 고기를 잡아간다며 욕을 하며 쫓아다니면서 
딴죽을 걸기 시작했기에 속이 불편해진 양순한 선장이 외연도가기를 꺼리기에
할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기에 오천항도 찾지 않게 되었다.  
얼마가 지나서 곁들이 찬을 엄청나게 내준다는 식당이 생기면서 오천 항이 외지에 
알려지게 되면서 관광객이 찾아들게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이렇듯 급한 발전이 있게 된 것이 
무창포에서 고향인 오천 항으로 낚시점을 옮긴 김 선장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것 같다.
수많은 참돔과 주꾸미와 갑오징어가 어부들이 아닌 낚시꾼이나 놀이 객들에게 수난을 당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 불과 몇 해나 되었을까?
아는 이가 외지인들이 주꾸미를 너무 많이 남획하여 어자원감소로 고충을 당한다는
어느 어부와의 방송 인터뷰를 보고는 낚시로 잡으면 얼마나 잡는다고 어자원의 감소를
엉뚱하게 우리에게 뒤집어 씌우냐며 흥분을 하다간 이곳저곳에 반론의 전화를 했다는데 
글 세나........... 그물로는 씨를 못 말려도 낚시로는 씨를 말린다는 속담도 있을세.......
올림픽 공원이 생기기전에는 이곳저곳에 작은 웅덩이가 수십 개나 있었기에
대나무 낚싯대를 들고 가 지렁이를 대충 끼워 드리우면 손바닥만 한 붕어며
메기, 동자개가 곧잘 잡혔기에 일요일 아침부터 서둘러 달려가던 화수분 놀이터였다.   
어느 날, 근처의 큰 연못으로 낚시를 갔다가 공탕을 치고 돌아가는 것이 분명한, 
제대로 장비를 갖춘 낚시꾼이 한동안 바라보더니만 회가 동했는지 체면불구하고
틈새에 끼어들어 짧은 그라스롯드 낚싯대를 펼쳐 디밀더니, 순식간에 여러 마리를 
낚아 올리더니 까닭을 알 수 없는 한숨 섞인 탄식을 토해내다간 날이 어두워지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다가 가버렸는데 또, 그 옆에서 구경을 하던 동내 아저씨들이 
웅덩이의 물을 퍼내면 매운탕꺼리가 많이 나올 거라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기에
아버지와 함께 온 동내 친구하나를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이자석아, 너희 아버지가 이 웅덩이의 물을 퍼내고 고기를 몽당 잡아삐리면 
우리들 놀이터가 없어지는데 친구들이 널 가만 놔둘 것 같니? 오늘밤에 집에 가서 
너네 아버지를 잘 구워삶아 웅덩이에 손을 못 대게 하란 말이다......”  
여럿의 다그침에 그만, 울상이 되었던 녀석이 말도 제대로 못 꺼냈는지 다음날 
어른 여러 명이 덤벼들어 물을 퍼내기 시작했기에 과연 고기가 얼마나 있을까 
구경을 하러 달려갔다.  
양쪽에서 끈을 달아 물푸레 통을 만들어 해질녘까지나 되어서야 웅덩이의 바닥이 드러났는데
열댓 마리의 고기가 고작이었다. 흙바닥으로 숨어들었을 거라며 괭이로 바닥도 파보았지만
자그마한 메기나 두어 마리 더 보았을 뿐, 그 많을 것 같던 고기는 다 어디로 갔을까?  
나중에 선친께서 그 이야기를 들으시곤, 
“그물로는 씨를 말릴 수 없어도 낚시로는 씨를 말릴 수 있는 거란다……. 아마도
 너희들이 매일같이 잡던 고기가 몇 마리 남았을 때에 물을 퍼냈을 게야…….
 너희들이 낚싯대로 계속, 고기를 잡는다했어도 그 다음날이 마지막이었을 게고.......”
얼마 후에 집 가까운 곳에 있는 시골마을에 가게 되었는데 자그마한 연못 하나가
있는 것이 눈에 뜨였고 붕어가 있을 것 같기에 동내사람에게 낚시를 해도 되겠느냐고 물으니 
동내사람이 잉어를 키우던 곳이었는데 출하는 했지만 못 잡은 잉어가 몇 마리 
남아 있을 테니 연못의 주인이 허락을 안 할 것이라 했다.  
밤이 깊기를 기다려 몰래 조그마한 플래시를 켜놓고 열댓 마리의 붕어를 잡다보니
갑자기 격한 당김이 있더니 채비가 끊어져 나간 것이 남아있다는 잉어의 짓이 분명한 것 같았다.  
다음번에는 굵은 줄과 바늘을 준비하여 주먹만 한 깻묵덩이를 달아 던져놓고 방울도 없이
줄만 잡고 있다 보니 손가락사이로 나일론 줄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왔고 제법 큰 잉어를 
한 마리 끌어낼 수가 있었다. 다음번에도, 그 다음번에도 가기만하면 잉어를 한 마리씩
건져올 수가 있었는데, 고기잡이라면 빠지지 않는 친구 놈이 한 번에 잡아내겠다고 
초코 그물을 가져가 쳐두었더니 무언가 큰 고기가 그물에 구멍만 내고말기에
엄청나게 큰 잉어가 있겠다고 생각하여 투망을 갖고 가서 잉어를 잡을 수가 있었다.
재미가 들려 며칠 더 다니게 되었는데 어느 날 밤에는 뒤통수가 께적지근하다 싶었더니 
연못주인이 뒤에 와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이미 소문을 들었던가보다....... 선친과 잘 아는 사이였기에 큰 야단을 치지는 않았지만 
미처 잡아내지 못한 빠삐용 잉어가 있음을 확인했으니 이번 기회에 아예,
연못의 물을 빼내어 잉어도 잡고 매운탕꺼리용 붕어도 한삼태기 건져 
동내잔치를 해야겠다고 했는데 막상 물을 퍼내고 보니 잉어는커녕, 달랑,
손바닥만 한 붕어 몇 마리뿐이었다.  
연못의 바닥은 자잘한 자갈이 깔린 것이 곡괭이로도 바닥이 파헤칠 수 없는 단단한 지형이라
바닥을 파고들 수도 없었기에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몰라들 했는데 선친께서만 까닭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계셨었다…….  
“너희들이 마지막 고기를 잡았던 게지..............”

 

   
오천 항이 사람들마다 많게는 수백 마리씩, 적게는 몇 십 마리씩 주꾸미를 잡을 수 있다는 
하루꺼리 소문난 놀이터로 유명해졌기에 하루에도 수백 명이 찾아오게 되었지만
초기 때와는 달리 서비스는 엉망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지난해만해도 점심도 제공하고
라면도 끓여주고 갑오징어회도 떠주었는데 돈독만 들어버린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뱃사람들 중에는 손님에게 이슬을 훑어먹겠다며 알아서 갖고 오라며 강압도 하고 
초장이 없으니 데침도 못해주겠다고 버티면서 전날 마신 술 냄새를 고귀하신 손님들에게 
마구 뿜어내기도 한다니 오늘 얻어먹은 주꾸미 데침 너댓마리와 몇 마리가 들었는지 
셀 수 있는 주꾸미라면 한 냄비로 열댓 명이 두 공기씩이나마 국물 맛이라도 본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아? 박 씨가 집에서 김치라도 가져가지 않았다면 달랑, 한 가지만 실었던 생무채로 
결은 라면 맛을 씻어내지도 못했었을까? -,,-  
인터넷게시판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호황인 날이었다면 점심을 먹자마자 항으로 
돌아가는 배들이 있었을 텐데 오후세시가 다되었는데도 한척의 배들도 움직이질
않는 것이 전반적으로 부진한 날인가 보다.   
탁한 물색과 수온이 내려갔다지만 마흔 마리의 주꾸미와 댓마리의 갑오징어가 전부였는데
나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니 손이 녹슬었다는 소리는 안 해도 되지 않겠어? -,,-  
“너무 늦게 오셨네요……. 이젠 파장시즌인데 오셨으니.......”  
화사도로 마지막 참돔낚시를 다녀왔다는 김 선장의 배도 들어왔지만 그네들도 고기구경을
못한 날이었다니 늦걸음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고
두 접시의 주꾸미로 노모와 딸내미의 입맛을 다실 수 있었으니 이런 흉년이 있나…….

 

   
안과치료가 효과가 있었는지 어느 정도 시력도 살아났기에 일상으로 복귀하여
예전과 같은 날들이 이어지게 되었지만 그저, 언제쯤 또 한 번, 탈, 서울을 펼쳐볼까,
물때에 맞추어 보려고 새벽별을 보고나가 저녁달을 보며 들어오는 일정을 
피곤한 줄도 모르고 무리하게 진행해보고 있었지만, 시간이 날듯하면 
날씨가 앞을 가로 막으니 그물에 갓 담긴 감성돔을 보았다며 소식을 알려온 선장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 감성돔이 모습을 비췄다 이거지? 그러니 어쩌라고??????)  
날이 괜찮다 싶으면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기고, 호랑이 마나님은 새 생명이 곧,
세상을 볼 테니 대기하고 있으라며 엄중한 경고를 보내니, 연실, 눈치만 보는 날만
덧 생기다 보니 손가락꼽기도 신물이날지경이었다.  
서 씨 아저씨에게서 문자가 왔는데 통영에서 갈치와 함께 춤을 춰보자는 
해괴한 문자였기에 갈치 잡이라도 한번 가자는 가보다 했더니 시락국을 먹으며
보낸 문자라고 했다……. 시락국? 이런, 통영이잖여? 못된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다음날 늦은 오후에 와서는 이백 마리의 갈치와 씨름을 하노라 밤을 딸깍 새웠다며
세손가락짜리 갈치 열댓 마리를 던져주고 가버렸다.
 
  

탁소장에게서 전화가 왔다. 데모크라시란 쾌속선이 운행하기 시작하면서 거문도의
낚시전성기가 일어났는데 배의 성능을 과신했던 선사에서는 거문도에서 추자도까지
연결운행을 하기로 한 것이, 거문도에서 고기가 안 잡히면 추자도로 옮겨가는 낚시꾼까지 
목적으로 했지만 결국엔 아니다 싶었는지 거문도만 운행하기로 결정을 했었다나?!  
거문도의 전성기때 함께, 갯바위를 누비면서 가거도며 태도며, 원도 권으로 
낚시를 다녔던 사람이 어쩐 일인지 여수로 갈치 잡이를 다니는 버스를 운행하게 되었단다. 
낚시는 낚시고, 업은 업인지라 원도 권으로의 개인적인 낚시취미는 당분간 잊기로 했다며
부업차 벌렸다며 길일을 잡았기에 연락을 하오니 갈치 잡이를 한번 가자고 했다.  
천호대교 밑의 넓은 주차장으로 서 씨 아저씨도 꼬드겨 내어 돌 게장이 곁들인 
점심을 먹고 보니 여수와 본지 참, 오래되었구먼…….  
후발 주자인 만큼 다른 낚시점과는 차별화된 서비스를 펼치겠다며 장갑도 몇 켤레씩
나누어 주고, 입고 간 옷위에 바로 입으라며 큼지막한 작업복도 서비스로 한 벌씩 
내주었는데 푸르딩딩한 색깔의 옷을 입고 보니 손님들 모두가 스머프가 되고 말았다.  
내린 풍 닻이 자리를 잡았고 불도 밝힌 지가 오래되었는데도 갈치구경을 하기가 
어렵다 보니 자리를 옮기겠다며 다시 닻을 거둬들이고 30여분을 더 달려가 
자리를 잡은 것이 주효했는지, 내리자마자 갈치가 낚여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점점 밤이 깊어지면서는 바늘 일곱 개를 매단 채비에 몽땅 걸이를 한 퍼펙트도 
몇 번 있다 보니 백여 마리 넘게 갈치를 잡았나보다…….  
한밤중에 서비스로 제공한다는 갈치 회나 무침이 안 나오기에 아직 시간이 멀었나보다
시간을 잊고 있었는데 자고 있다가 깨어났는지 목소리도 어눌한 선장이 마이크를 켜들고선
10분후 철수를 하겠다기에 시간을 확인하니 새벽4시였다.  
한참 갈치가 잡히기 시작했기에 아쉬운 마음이 들어 진작에 철수시간을 일러주던지
1시간 정도만 더하면 좋겠다고 소리를 질러봤지만 매몰차게 뱃머리를 돌려 
전속력으로 여수항에 들어서니 날도 밝지 않은 어두운 새벽이었고 까 실한 아침밥을 먹고 
정리를 하다 보니 그제야 뒷배들이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그네들도 새벽에
호황이 있었기에 선장이 1시간씩 연장을 했기에 쿨러를 가득 채울 수 있었다고 하는데 
우리는 어째서 급히 들어왔을까?
근면하지 않다고 손님들이 계속 불평을 하자 선주가 선장과 조수를 바꾸겠다는 
마지막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니 이리 재수가 없을 수가 있을까........  
딸내미가 좋아하는 갈치를 손질하면서 작은 갈치는 들은풍월대로 젓갈로도 
한 병 만들어 담아보았지만, 이런 고기잡이가 성에 찰리가 없다보니 언제나 
갯바위로 달려가 풍그덩~! 하니 대를 담그고 뻘건 찌를 흘려볼 수가 있을까?!

   
남은 공사일정을 이어가며 이제나 저제나 기회가 주어질까 넘보다 보니 
핑계거리가 하나 걸려들었다. 오랜만에 연락이 온 주사장님의 전화번호가 뜬 순간, 
낚시를 갈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애써 점잖게 목소리를 깔아가며 호흡을
가다듬기도 전에 대뜸하시는 말씀이  
“낚시가자?! 만재도 4박5일 어때?”  
“글쎄올시다……. 시기도 약간 늦었거니와 너무 추운 날이 이어지니 물색, 수온, 마땅치 않잖아요?”  
“뭐 그래도 내 고기는 있는 것 아니겠어? 날 좀 잡아보라구........”  
만재도를 드나든 지 20년이 넘는 선임자의 청을 거절하기도 그러니 서둘러 날을 잡아볼밖에…….  
그래도, 선거는 하고 가야한다기에 D-day를 19일 저녁으로 잡고는 서둘러 일 정리를 하고는
고속도로에 차를 얹은 것이 오후 8시경이었나 보다…….  
투표결과를 라디오로 들어가며 흥분을 하는 선임자의 장단에 맞추다 보니 
부여의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었나보다. 갑자기 길 안내를 하는 기계에서 
목포까지의 거리가 더 멀어지며 도착시간도 새벽 1시가 넘겠다는 안내를 보고서야 
아차, 확인을 하니 삼천포가 아닌, 예산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뜨였다. 자칫하면 
배 출발 시간을 지키기도 어렵겠기에 경제속도를 제쳐놓고 발에 무게를 주어 
새벽1시에 목포의 낚시점에 도착을 하고보니 늦었다며 계산은 나중이고 
준비물부터 챙기라기에 서둘러 밑밥이며 미끼를 챙기다 보니 ‘가만있어라???’
온갖 소품이 담긴 낚시조끼를 사무실 옷장에 예쁘게도 걸어놓고 그냥 나왔다는 
생각이 났으니 이를 어쩌면 좋누?
낚시점에서 조끼를 하나 집어 들고는 바늘이며 소품이며 목줄까지 대충 새로 챙겨들고
북항의 돌지 않는 풍차가 있는 출발장소로 서둘러 달려갔는데 태도쪽 손님이 많기에 
태도를 먼저 들러서 간다니 시작부터 꼬이는 것이 어째 요상한 오멘 아니겠어?  
그래도 비교적 잔잔한 바닷길을 달려가서 태도에서 일단의 손님을 내려주고 
만재도에 도착하니 날이 훤하게 밝기 시작했는데 5시간은 족히 걸린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