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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담긴 조행기/만재-가거-추자-거문-제주

3. 봄 바람을 타고 간, 가거도의 볼락낚시

by 찌매듭 2018. 5. 23.

 

 

 

 

 

 

 

 

 

 

짧은 휴식을 제대로 해야 또 한 번의 밤을 보내겠기에 휴대폰도 잠시 꺼두고

훼방 없는 단잠을 자고 있었는데 너무 바닥의 온도를 올렸던지 더워서 잠이 깨고 말았다.

 

, 열두시……. 세 시간 동안 졸도를 했었는지 꿀잠을 잤던 건지 모르겠다.

5월의 추운 봄날을 만나서 보일러 열기에 취해 있었다니…….

 

잠시 환기를 시키고 다시 잠을 청해보려는데 젊은 선장의 각시가

점심식사를 하라고 소리를 쳤다…….

 

아직 생각이 없다고 하니 오늘 들어오신 손님이 있어서 같이 식사를 차렸다니

나중에 따로 차려달래기가 미안하겠기에 억지로라도 한술 뜨는 것이 낫겠다며

옆의 일행을 일으켜 세워서 세 사람의 손님과 마주했다.

 

점심에는 홍합조림과 열기반찬이 나왔는데 지금이야 가거도도 경쟁시대가 됐고

1주일마다 다니던 행정선 시대에서 격일제로 다녔던 쾌속선도 현명한 도지사의

도서 민을 위한 행정으로 매일같이 다니게 되었기에 생활권이 편해졌기에 뭍에서 들여오는

식재료구입이 수월해졌지만 가거 도라고 아무 때나 열기반찬이 나왔던 건 아니었다.

 

격일제로나마 쾌속선의 운항이 시작되어 가거도의 전성기가 시작된 구십년 대의 언젠가

감성돔 낚시 손님이 몰렸던 2구의 민박집 선장은 열기를 잡는 배에서 손님들께 내줄

반찬고기를 사야했는데 그날, 그의 부인이 고단했는지 깜빡 낮잠에서 깨나지 못한 순간에

1구의 어선배가 그냥 지나쳐갔었기에 반찬장만을 못했었다.

 

반찬이라야 매끼니 마다 멀건 된장국에 짠 김치 두어 쪽뿐이라 생선 반찬이라도

한 토막은 꼭 내주어야했기에 만만한 것이 열기였는데 손님들 눈치를 보게 생겼다.

선장은 그 흉악한 성질을 못 이겨서 손님들이 쳐다보는데도 온갖 쌍욕을 섞어가며

반찬거리열기를 사놓지 않았다고 자기 마누라를 잡아먹을 듯이 성질을 부렸기에

나이든 손님이 말렸지만 듣지를 않자, 손님과 언성이 높아졌고 많은 손님들이

1구 마을로 자리를 옮겼는데 결국은 건강상의 문제도 있어서 문을 닫고 말았었다.

 

코흘리개에서 가거도 에서 최초로 낚시손님을 받았던 임 씨가 1구로 옮겨서

새집을 짓고 본격적으로 민박집을 시작한 것이, 어디에서와 같이 낚시를

좋아하는 손님들 덕이었는데 몇몇 손님들이 뜻을 모아 배를 한척 지어서 맡기기로 했다.

 

목포항에 끌어다 놓은 배를 가리키며 앞으로 자네가 맡아서 잘 운행하라고 당부했는데

흥분을 했기에 잠이 오지를 않았는지 한밤중에 살그머니 나가서 시험운항을 해보았는데

저런, 아직 엔진오일을 넣지 않은 걸 몰랐지 뭐니?! -,,-

 

엔진이 달라붙어서 다시 보링을 해야 했기에 연두색의 가거도 최초의 낚싯배는

말 못할 속병을 끌어안은 채로 속력 한 번 시원하게 못내 보고 평생을 기어 다녀야 했다.

 

어느 여름날, 오동 여를 가려고 느려터진 배 인줄 알기에 평소보다 일찍 나서긴 했지만

훨씬, 늦게 나왔을 배들이 추월해가선 포인트를 선점하는 바람에 울화통이 터져서

집을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만 해도 많은 민박집이 생겨난 이천 년대 초였다.

 

세 번째인 임 선장이 가정불화와 못된 손장난에 빠져서 아침은 건너뛰기가 일수였고

한겨울의 도시락도 우유와 빵을 사다 주며 때우라고 내주곤 하기에 이차저차,

벼르고 있던 참에 새천년 대를 맞아서 네 번째로 옮긴 집도 임 선장이었는데

가거도 에서는 돌을 던지면 모두가 임 씨가 맞을 정도로 많다는데 집 근처에 생긴

치킨 집 상호가 신안치킨이라기에 목을 적시러 들어가 보니 가거도의 임 씨 아줌마라니 별일이었다…….

 

 

 

 

 

 

 

 

 

 

 

 

 

백 여 계단을 올라가야만 하는 산꼭대기에 둥지를 튼 임 선장의 집은

겨울철에 오르내리기에도 머리에 김이 날 정도였고 여름철에는 짐 관리까지 보통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얼마 후에는 그 집 동생이 어업 일을 시작했기에 간이식 건물과 냉동고를 지었기에

짐을 놓고 다닐 곳이 생겨서 다행이었지만 한 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올 생각이 끔찍스럽긴 했다.

 

가끔 임 선장이 한가한 시간이 생기면 잠시 농어를 치겠다고 빨리 루어대만 들고 내려오라는

연락이 오면 얼씨구나뛰어 내려갔다간 두어 번 오르내리다 보면, 체력단련이 절로 됐다.

 

동생은 가거도 에서 유일하게 볼락 그물을 놓는다고 했는데 물속지형이 볼락들이

오가는 길목을 혼자만이 알고 있다기에 다른 배들이 그 자리를 넘보며 따라 다녔지만

헛 그물을 몇 개 놓아가면서 연막을 치는 병법까지 통달했는지 소리 없이 볼락을 잡던데

그 자리가 어딘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느 겨울날에 첫 번째 순서가 되어 먼저 출발을 했지만 십 분후에 출발한

두 번째 배가 초입에서 부터 추월을 해 나갔고 느려터진 임 선장의 배가

옆 파도에 한쪽으로 쏠리면서 기울었다간, 갑작이 생겼을 다른 파도를 덧 맞고는

몹시 기울어졌는데 좁은 선실 안에 들어앉았다가 그 순간에는 정말 배가 넘어가는 줄 알았다.

 

어두운 선실 안 이었지만 임 선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보았고

찬물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는데 배가 다시 일어선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가장 느려터진 작은 배에 위험스럽기까지…….

얼어 죽을 놈의 의리 좋아하네…….

매번 포인트나 빼앗기고…….

 

매번, 나를 먼저 내려 주는 것은 좋지만 다른 손님들에게 눈치 보이고

그러다 보니 낚은 고기가 있으면 회감으로 내놔야하고…….

임 선장이 회감 장만 하려고 꼼수를 쓴건 아니었을까?

 

 

배를 바꾸고 새집도 지어서 밑으로 내려오기 전에는 다시는 안 오겠다고 맹세한 것이

그 다음해 여름이었다.

 

서 씨 아저씨와 단둘뿐이었으니 전날에는 국흘도 작은 여까지

도시락 두개를 싸들고 다녀왔었기에 멀리까지 가겠다고 하기가 미안해서

세 번째 날은 가까운 성건 여에 내리라기에 그러라고 했는데 내려서 보니

그물이 겹겹이 둘러싸여 있어서 농어 한 마리 기어들어올 공간이 없었기에

자리를 옮겨야겠다고 전화를 했는데 오지를 않았고, 입질 한 번을 변변히 못보고

날 눈으로 밤을 새우고 말았는데 한낮이나 되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와서는

눈도 마주치지를 않기에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었던가?

그때만 해도 덜 성숙한 때였으니 한바탕은 모자라 몇 바탕을 했었던 것 같다. ^^;;

 

 

 

 

 

 

 

 

 

 

 

 

 

2007년의 겨울에는 진도의 오케이 낚시점의 배를 타고 오래전에 갔었던 3구의

꼭대기 집으로 갔었는데 오랜만에 보는 아줌마는 어디선가 뵌 적이 있는 분 같은데

어디서 봤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다기에 유 선생님을 따라서 첫발을 디뎠던 적이

오래전이었고 몇 년 다니다간 2구와 1구 쪽으로 다녔다고 하니 유 선생이 누구냐고

묻기에 예전에 유주방님을 따라왔었듯이 오늘에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왔노라고 하니, “~? 유주방님?” 유 선생님의 제자분이 오셨다며 온 식구가

차렷 자세를 취하여 새삼 유 선생님이 대단한 분이라는 걸 알았다.

 

 

그해 봄에 노모에게 회복이 불가능할거라는 큰 병이 나셨기에 노모 생전에는

다시는 가거 도를 못 찾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만재도와 달리, 큰 물골을

더 넘어야하는 가거도 에서는 여차하면 빠져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생긴다 는걸.

너무도 잘 알기에 여름 낚시를 오라고 연락이 온 임 선장의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고

매몰차게 여러 차례 끊어 버렸었다.

 

 

새로 들어 온 손님 중에 안면이 있는 손님이 한 사람 있었는데 그도 예전에는

임 선장 집을 다녔었는지 그곳에서 본 기억이 있다고 했는데 누구인지 정확한

기억이 나지를 않으니 흐릿해져가는 기억을 어찌하면 되돌릴 수가 있을까?

 

점심을 먹고는 한 번 더 쉬어야했다.

어제의 미역작업이 안 끝났기에 선장이 늦게 들어온다고 했는데

한번 깬 잠이 다시 오지도 않기에 억지로 뒤척거리다가 저녁 도시락을 받아들고

나서게 되었지만 좀 늦은 것 같았기에 오늘은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잡아야겠다.

 

 

볼락 떼가 있을 첫 골목을 지나면서 옆집에 사는 예전의 동서울 낚시점주가 생각났는데

그도 유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가거 도를 알게 되어 가거도 에서 오랫동안 생활도

한 적이 있다는데 신통한 배가 없던 시절에는 멀리 갈 수가 없었기에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있는 첫 번째 홈통에서 주로 낚시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는데

한번은 큰 감성돔 떼를 만났다고 했다. 크릴도 구할 수가 없던 때였으니

마땅한 미끼로 그물로 잡은 손가락만한 홍새우를 얻어서 소금을 뿌려 두었다

미끼로 사용하며 여러 날을 버티다가 장대에 걸려드는 고기들이 커다란

참돔만한 크기의 감성돔이었다는데 얼마나 고기들이 큰지 사람을 깔보는 듯이

눈을 데굴거리며 제멋대로 낚싯대를 끌고 다니다가 줄을 끊고 가버렸는데

운 나쁜 감성돔 한 마리가 끌려 나왔다나보다.

그 크기가 칠십을 넘어 팔십이었다는데 어쩌면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그런 꺼먼 거짓말을 할 수가 있을까?!

 

한잔하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속에 둔촌낚시라는 처음 보는

낚시가게가 생겼기에 아무리 임대료가 저렴하다고 해도 이런 골목 속에서

낚시가게를 한다면 어떤 손님이 올까????

그것도 민물낚시가게도 아닌 구멍가게 수준의 바다낚시가게라니?

 

구십 년대 초에는 우럭낚시를 전문으로 하는 용산 낚시점이나 마량근처에서

선상 처박기 낚시를 하는 정도의 자양낚시점 정도가 있었을 뿐 서울에서는 바다낚시가

이른 시절이었는데 유리창에는 태도로 출조를 한다는 붓글씨로 쓴 종이장이 붙어있었기에

신기한 마음에 들어가 보게 되었던 건데 칠짜 감성돔이 어떻고 팔짜 감성돔이 어떻다며

떠벌리는 낚시점주의 기괴한 소리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유 선생님 이야기도 나왔기에

어찌된 일인지 더 듣다보니 그도 가거 도를 다녀왔다고 했다.

 

맞는 이야기도 있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도 있기에 하나님도 인정하는

낚시꾼 뻥이라며 실소를 흘리다간, 나도 유 선생님을 알고, 가거 도며 태도며

진작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하니 휘젓던 손을 슬그머니 내려놓기에 일어나 나왔다.

 

그때의 생각이 나서 이 씨를 알고 있는 임 선장과의 술자리에서 낚시점의 주인이

큰 감성돔을 잡았다고 뻥을 치더라는 이야기를 하니 한참을 생각하더니 오랜 이야기지만

맞는 말이라며 정색을 했다.

 

지금은 자원이 고갈되어 오짜 감성돔도 대단하다며 은근히 장사 속으로 부추겨 세우지만

예전에는 감성돔은 못 쓰는 고기 취급을 받았다.

날씨도 나쁜 겨울철에나 나타나는 고기인데다가 그물에라도 걸려서 물칸에 살려 두려면

예민하여 오래 가지를 못하니 상품성이 없어서 모아두었다가 내다 팔기가 어려웠다.

 

참돔이나 우럭 같은 고기들은 소금간이라도 해 두었다가 헐값에라도 넘길 수가 있었지만

감성돔은 그러질 못했기에 초기의 가거도 에서는 대단치 않은 물고기였기에

가거도의 개새끼 크기에 따라서 물고 다니는 크기가 달랐었는데 작은 강아지는 사자나 오짜급의

감성돔을 물고 다녔고 큰개는 육짜 감성돔을 물고 다닐 정도로 흔한 고기였으니

귀찮게 자질을 하기보다는 모든 고기를 저울로 무게를 달아서 값을 정할 때였기에

그 사람이 커다란 감성돔을 들고 자랑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가거도 사람들이 모두

봤다며 그 감성돔이 칠짜라해도 맞을 것이고 팔짜라 해도 맞을 것이라며

엄숙한 표정까지 짓기에 아무런 말도 못하고 술잔만 넘겼던 생각이 났다.

하기야 옛날에는 호랑이도 담배를 피우고 다녔다던데...... .…….

 

그러고 보니 실체를 알 수가 없는 어탁 본을 몇 장 본적이 있는데

육군본부에 근무했던 정 문관이란 분이 엄청나게 큰 탁본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고는

낚시춘추같은 전문잡지사에 알리지 않았느냐고 하니, 더 큰 고기를

잡은 사람도 있다며 말을 흐렸고, 퇴계로에 있던 스카라 극장 옆에 있던 약국에서

드링크를 사서 마시다가 약사의 뒤에 엄청나게 큰 참돔 어탁이 걸려있는 것을 보곤

잘못 넘긴 드링크에 사래가 들어 캑캑 거리면서 한참 쳐다본 적이 있었는데

알려지지 않은 기록들이 어디 한둘이어야지…….......

 

 

어느 날 사무실의 문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는데 어떤 손님이 찾아왔다고 했다.

 

비닐봉지에 무언가를 담아들고 들어선 사람은 얼마 전에 본 낚시점의 주인이었는데

이 사무실에 바다낚시를 제법 다니는 손님이 있다기에 대화를 해보려고 찾아왔다는데

내 얼굴을 보더니 박카스 상자만 내려놓고는 돌아서서는 쏜살같이 가버리고 말았다……. 

 

 

 

 

 

 

 

 

 

 

 

 

 

 

1995년 여름날, 집 근처의 주유소 옆에 세계로 가겠다는 낚시가게가 새로 생겼는데

말대가리라는 별명을 지닌 초등학교 동창 놈이 주인이라고 했다.

 

둥글 넙데데한 얼굴이 말상이 아니었는데 왜 말대가리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중학생 때까지는 꽤나 친하게 지낸 적이 있었기에 한눈에도 알아 볼 수가 있었는데

바다낚시를 전문으로 하는 낚시점이라니 자주 드나들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선두주자 격이었는데 출조 버스도 움직이고 그때로서는 규모도 큰 편이었다.

 

큰 도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시간이 나는 데로 출조도 같이 하고 물건도 구입하며

이슬도 자주 기울였는데 거문도로만 출조를 하기에 추자도며 태도로 낚시를 다녀오면

섭섭한 기색을 보였는데 생초보자들만 득시글하니 내 낚시를 하기가 어려웠다.

 

찌낚시의 초보자들이 대부분이다 보니

찌매듭-멈춤 구슬-구멍 찌-고무 쪼가리-수중 찌-, 고무-도래를 끼우는 순서를

곧 잘들 잃어버려 아예 채비 도를 종이에 그려서 주어야 했는데 어떤 초보와 함께

갯바위에 내렸더니 구멍 찌가 고장이 났다고 난리를 떨기에 자세히 보니

0.5호 구멍 찌에 0.8호 수중 찌를 장착 해놓고도 목줄에 봉돌을 과하게 달았으니

저절로 잠수 찌가 된 형국이었으니 하품이 날 지경이었다.

눈물은 또 왜 덩달아 나는지……. ~~~ -_-,

 

그때만 해도 고 부력 찌에 속하는 1호찌는 흔하지가 않아서 물 건너

섬나라의 제품을 주로 이용했었는데 언젠가 낚시점을 들러보니

수입사의 간부였던 부장이 집수리를 한다기에 가보니 직장에서 하나둘씩

집에 가져왔던 구멍 찌가 수백 개가 있기에 못 보던 신기한 것들을 매만지니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몇 개 가져가라고 했다.

 

수리가 끝나고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저렴하게 정산을 봐주었던지 고마워하면서

구멍 찌를 가져가고 싶은 데로 가져가라고 해서 눈치를 보면서 호주머니 속에

우겨넣은 것이 수십 개는 됐었는데 그때는 구멍 찌 값이 상당히 비싼 때였기에

수리비의 몇 곱을 챙겨온 기분이었는데 누가 수지를 맞은 건지 모르겠다…….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