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담긴 조행기/만재-가거-추자-거문-제주 만재도 外傳 2. (함께 였기에 기쁘고 즐거웠는데......) by 찌매듭 2011. 9. 23. 드디어 만재도 본섬을 밟아볼 수 있는 날이 왔다. 손님이 오시는 날이면 섬의 배들이 모두 나와 갯바위로 실어 옮겨주고 받는 입도료 몇 천원은 모아서 마을의 발전기금으로 사용한다니 만재도에 도착하면 꼭, 어느 배를 타라고 정해져 있지는 않았지만 우연하게 같은 배만 계속 타게 되었는데 점심 도시락을 가져왔을 때 우왕좌왕 섞인 탓에 잊어버렸던 짐 가방 하나를 찾으려고 본섬으로 가야했다. 이제는 낯익은 어느 영감님의 배를 타고 만재도 본섬에 도달하니 배를 댈 수 있는 방파제나 발을 디딜만한 바위도 없었기에 몽돌 밭으로 배를 디밀고는 뛰어내려야했는데 물위에서 본 것과는 달리 상당히 높은 편이었는데 물속에 잠긴 부분이 많아 배가 작게 보였나보다. 겉에서 보기보다는 홀수가 저렇게 깊기에 험한 날을 만나도 좀처럼 전복이 되지 않는 안전한 목선이라고 했는데 갯바위에 부딪어도 쉽게 파손이 되지 않으니 택택이라고 얕보면 안 되는 것이여……. 발이 닿는 순간, 자갈이 패이면서 충격이 줄지 않았다면 아차, 잘못되어 발목을 삘 수도 있으니 조심해서 뛰어야한다고 후배에게 일렀는데 저 놈이 먼저 뛰어내렸어야 하는 거 아니었어? -_-? 그래도 한쪽 발은 바닷물에 적셔야했으니 섬 구경을 하겠다고 따라 나왔던 다른 일행은 목선위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며 몸을 사렸다. 몽돌 밭에 내려져 있었던 짐 가방을 찾으니, 할머니가 영감님의 늦은 점심 겸, 저녁밥을 재촉하기에 잠시, 섬 집에까지 가보게 되었다. 반찬이라야 달랑 김치쪽 한 접시였고, 물이 담긴 그릇 두개와, 양푼만한 국그릇에는 홍합이 세알 담겨 있었는데 키조개만하다보니 밖으로 떨어질 것 같았다. 홍합의 껍데기를 잘라내어 국물부터 먼저 떠먹고는 홍합 알갱이가 만두만 하다 보니 한입 베어 물고 몇 번을 씹고는 물그릇을 들어 한 모금 마시더니 거한 소리를 냈는데, 그릇 두 개 중 하나는 진짜 물이 담겼고, 또 하나는 막소주였다. 급히 식사를 마친 영감님이 물이 들어올 때 다녀와야 한다며 몽돌 밭으로 가서 줄을 당겨 주기에 배위에 있던 일행의 손목을 잡고 어렵게 배위로 기어올랐지만 영감님은 무릎까지 물로 걸어 들어가서는 쉽게도 배에 올라 얼떨떨하게 쳐다본 기억이 난다. 다음번에는 수박을 두통 갖고 가게 되었는데 배안에서 한통이 부딪쳐 금이 가버렸다. 선임자가 다음부터는 라면박스에 한통씩 꽁꽁 묶어서 담아가야한다고 일러주었고, 영감님에게 전하고는 일정을 끝내고 밤늦게 서울에 도착하여 무사히 집에 왔노라고 전화를 하니 ‘이 먼 곳까지 왔다가 집에 무사히 도착했다니 감사하고 고맙다는 소리와 함께 무슨 소리가 안 들리느냐’고 물어왔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소리가 들릴까? 섬마을이니, 바람소리? 파도소리? 아니, 무슨 기계소리 같기도 하고……. 내일 낮에 섬사람들이 모두 모여서 나누어 먹으려고 수박을 시원하게 하려고 냉장고에 넣고는 발전기를 돌렸기에 나는 소리라는 것이었다........ 만재도를 갈 적마다 친절하게 포인트나, 나름대로의 경험과 물 방향, 어느 부속 섬이 좋겠다는 조언을 해주던 영감님이었다. 혹시, 필요한 것이 있느냐고 물으면 먼 곳이라 맨몸으로도 힘드니 얼굴만 보는 것으로도 족하니 그냥 오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필요한 것이 있을텐데 수박, 참외 보다는 귤 같은 것이 쉬 상하지 않으니 좋지 않겠냐니 잠시 머뭇거리다간 사과가 낫겠다는 말이 나왔다. 쉬, 상하지도 않으니 오래 두고 먹을 수가 있는 귀한 과일이라며 네 쪽을 내면 네 사람이 먹을 수가 있고 혼자라면 이틀을 먹는다고 하기에 뒤통수를 맞은 듯이 띵한 기억이 떠올랐다. 소양호로 낚시를 갔을 때, 혼자서 텐트를 쳐놓고 두세 달씩 장박을 하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텐트의 주방구역을 보니 네 쪽을 낸 사과가 보였다. 눈길을 느꼈는지 말을 꺼냈는데. “사과로 배를 채울 일도 없고 심심풀이로, 영양제 삼아, 끼니마다 한쪽씩, 비타민을 한 알 먹는다고 생각한다” 고……. 한 사람은 자기의 건강을 위한 심심풀이로 사과 한쪽씩을 먹는다했고 섬사람은 귀한 과일이기에 아껴 먹어야 한다는 생각의 차이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외지인으로는 열 번째 정도로 섬을 밟은 편이다 보니 몇 안 되는 낯이 익은 섬마을 사람들을 보면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끝없이 물어보았는데 사람이 귀한 곳이다 보니 귀찮아하지를 않고 하던 일을 제쳐 놓고 상대를 해주었다. “이 본섬에서도 고기가 잘 잡히는가요?!” “외마도나 내마도가 더 낫지라~~~” “그건 또, 어에 있으며 얼마나 가야하느냐” 는 물음에 답하려고 가리키는 손끝을 쫓아보면 본섬에 가리워져 보이지도 않는 방향이었으니 알 수가 없었고 이상한 나라에 온 엘리스가 된 듯, 절반밖에 알아들을 수 없는 섬의 언어는 알쏭달쏭하기만 하여 짐작으로 넘겨야했다. 우리가 낚은 우럭을 보면, 섬 주민들은 황우럭만 먹을 뿐, 시꺼먼 개우럭은 만재도에서는 개도 안 먹는다고 천시했는데 꼬리가 둥글고 살색이 하얀 선상낚시에서 낚이는 심해우럭이었던가 보다. 잠간씩, 영감님의 배를 타고 낚시도 해보았는데 인천이나 안흥 쪽에서는 진작부터 사용하는 뱅뱅 돌아 잘 꼬이지 않는다는 바늘 두 개짜리 채비를 보곤 신기해하기도 했는데 만재도 에서는 꼬이거나 말거나 고기가 물고 올라오면 바늘을 끊어 내는 것이 더 편하였으니 우럭 같은 잡고기는(?) 고기 취급도 못 받는 곳이었다. 한번은 섬사람들이 남대문이라 부르는 근처에서 밤낚시를 하게 되었다. 큰 참돔이 곧잘 붙는 곳이라기에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안하고 낚시부터 하게 되었는데 같이 내린, 아담한 키의 꾼이, 왼쪽으로 자리를 잡고는, 10 미터자리 장대 두 대를 펼쳤는데 자기는 장대만 3대를 갖고 다니며 돌돔만을 낚는 마니아 중에 마니아라고 했다. 말하는 품새나 거무튀튀하게 주름진 얼굴이며 나이도 훨씬 많은 고수로 보였는데 '도대체 강호에는 얼마나 많은 기인이사들이 있는 걸까?' 오늘은 돌돔명인을 만났다는 생각에 채비며 움직임을 유심히 건네다 보고 있었는데 해가 지기 전에 그가 무언가의 입질을 받고는 강한 챔질을 하는 것이 보였다. “따, 다, 다, 닥~!!!!!!!!!!” 폭음이 들리며 장대가 네 토막이 나버렸는데 어찌된 영문인지도 모르겠다. 잠시 후에 그가 낚싯대를 제대로도 세우지도 못하고 쩔쩔매다가는 또 순식간에 여러 토막이 나버렸다. “돌돔은 아니야~!!!! 참돔이 틀림없어~!!!! 그렇지만 대체 얼마나 크기에.......” 탄식과 함께 재빨리 뒤로 돌아 앉더니 남은 낚싯대를 꺼내어 줄을 갈아매기 시작했다. 더 굵은 줄과 바늘로 바꾼다는 것이었는데 낚싯대와 사람이 버텨주지를 못하는데 더 굵은 줄과 바늘이 무슨 소용이 있겠누? 저런 대물을 만나봐야 헛고생만 하고 견적도 많이 나올 테니 아무 소용이 없을게다. 그저, 잡기 쉽고 가져가기 좋은 크기의 고기만 만나기를 후배와 눈을 마주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많이만 잡혀달라는 욕심과 함께……. 밤이 깊어가며 우럭도 낚이질 않기에 짐 가방과 쿨러를 위로 올려놓고 한숨 자기로 하였는데 자리에 누웠다간, 다시 일어나 안전하게 한걸음 더 위로 짐을 옮겼고, 그래도 또, 이상한 느낌이 들어 한 번 더 높은 곳으로 옮겨 놓고는 편편한 곳을 찾아 눕고 보니 모기떼의 공격이 보통이 아니었다. 두 줄만 싹, 싹, 바르면 모기가 덤벼들지 않는다는 유명한 제약사의 비싼 모기약을 발라보았지만, 분명히 두 줄이 긋고 지나가, 약이 발린 팔뚝에 모기가 앉는 것이 보였다. 얼마나 굶었으면 이렇게까지 대담할까, 가만히 들여다보니 그대로 피를 빨았는지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는데 선임자가 농담처럼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만재도 모기? 두 줄 싹싹 약을, 네 줄을 발라도 소용이 없어~! 마개를 따서 손바닥에 잔뜩 쏟아선, 싸구려 로숀 바르듯이 팍, 팍, 문질러야 효과가 좀 있지.........-,,-” 두툼한 낚시 복을 입고 옷에 달린 모자를 덮어썼고 목장갑도 두 개나 포개어 꼈고 소매를 당겨 손목까지 덮고서야 잠시, 잠이 들 수가 있었는데 정신없이 자다가 얼핏, 깨어보니 발 옆에 있던 쪽진 곳에 무엇이 보였는데 내 쿨러가 분명했다. 잠든 사이에 후배가 옮겨다 놓은 모양인데 기우뚱한 것이 내용물들이 흩어졌을 텐데 왜 저렇게 성의 없게 던져 놓았을까? 야단을 쳐야겠다며 다시 잠이 들었다간, 날이 완전히 밝아서야 눈이 떠졌는데 어째,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바닷물은 저만큼에 있었지만 주변이 물청소를 한 것같이 깨끗해졌고 분명히 발밑에 얌전히 놓아두었던 무거운 소품 통이 없어졌고 고가로 구입을 했던 국방색의 국산 찌 낚싯대와, 귀신들린 것같이 많은 수확을 올려 주었던 7미터짜리 장대가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후배 놈이 그렇게나 탐을 내던 낚싯대였으니 들고 가서 낚시를 하는 걸까?’ ‘대체 쿨러는 왜 이렇게 거꾸로 처박아 놓은 거야?’ 얼마나 세차게 집어 던졌는지 갯바위 틈 사이에 박혀 쉽게 빠져나오지 않는 쿨러를 빼내고 나니 뒤쪽에서 후배가 내려오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이람? 간밤의 상황을 추려내 보니 소리 없이 너울이 밀려와 쿨러 두 개를 쳐들어 쪽진 갯바위에 내려 박았던 거고, 소품통과 낚싯대는 쓸어서 가져간 것 같은데 내가 누었던 곳과는 불과 한 뼘의 차이였다는 생각이 들자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밑밥통과 미끼들도 쓸려 나갔으니 더 이상 낚시를 할 수도 없게 되었고 다른 곳에서도 같은 위험이 있었는지 택택이 배들이 달려와서는 이른 철수를 전했기에 짐을 꾸렸지만 파도가 있기에 자리를 안쪽으로 옮겨서 배를 타려니 너무 높아 뛰어내릴 수가 없었다. 짐부터 배로 집어 던져놓고는 목선의 앞쪽에 섬사람 두 명이 양쪽으로 서서는 뛰어 내리는 사람의 양팔을 받아 주면 충격을 줄일 수 있다는 위험한 철수였기에 후배는 울상을 넘어 불쌍인 상태였다. 어렵게 섬마을로 모여들긴 했지만 방파제가 없으니 몽돌 밭으로 뛰어내려야 하니 신발을 적시기가 싫거나 위험하다며 꺼리는 사람들은 목선위에서 남아 있다가 큰 배로 갈아탔고 섬을 밟은 사람은 아침식사를 준비해 놓은 어촌계장 집으로 들어갔다. 반찬으로 나온 거북손 조림이 비위에 상한다며 후배는 밥을 한 숟갈도 먹질 않았다. 경상도 깊은 산속 태생이라 바다가 신기하다며 끈질기게 따라 다녔지만 입이 짧아 가는 곳마다 고생이었는데 이슬에 밥 말아 먹는 것만 좋아하니 지가 뭐, 핑클 오라비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 이 섬에도 곧 전기가 들어온다고 하는데 늦은 새마을 운동을 했는지 수도꼭지가 달린 싱크대가 보였지만 손님들이 비운 설거지 거리를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어서는 바닷가로 가는 것이 물을 아끼기 위해서라는데 바닷물로 씻어 온 그릇들을 집에서 물탱크에 모아 놓은 빗물로 한번, 헹구면 끝이라니 세제 같은 것도 없었다니까? 글쎄~!!! 남은 시간동안 섬 구경이나 하려고 돌아다니다가 우물을 하나 발견했는데 맑은 물이 바가지로 바로 떠낼 수 있을 정도로 가득 차올라 있었다. 시원하니 등목을 하면 좋겠다고 엎드린 후배의 등으로 흘려주고 있었는데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다가오던 할머니가 보더니, 둥이 휘둥그레지며 물통을 집어 던지며 달려왔다. “에이, 에이, 이 천하에 고얀 것들, 이 신성한 우물에서 무슨 짓들이여~~~?!” 알고 보니 만재도의 생명줄인 단 하나뿐인 신성한 우물근처에서는 씻거나 닦지도 못할 뿐 아니라 더럽혀서도 안 된다는 엄한 규칙이 있었다는데 도대체 우리가 무슨 짓을 한 거야?! 과수원에 배를 따먹으러 갔을 때 이후로 이렇게 쏜살같이 도망을 친 적이 또 얼마만일까? 이번엔 자갈밭에서 미역을 말리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이 미역 여기것인가요? 파는 거야요~?!” ‘하모~! 얼마나 줄까? 한 뭍 주까? 두 뭍 주까?’ “한 뭍이 얼마큼인데요?” “한 뭍이면 스므장이제……. 한 삼만 원 달라면 비싸다 할 끼가?” 미역 값도 모르겠거니와 집에서 보던 것과는 다르게 누르스름하니 가져가서 칭찬을 받을지 구박을 받을지 알 수가 없어 그냥 지나쳤지만 마음약한 후배는 붙들려서 한동안 하소연을 듣다가는 결국에는 한 뭍을 사갖고 왔다. “집에 갖고 가서 어쩔지 모르니까, 절반을 갖고 가세요……. 야단도 절반만 맞게........” 물가에서 갑자기 환호성이 들려왔기에 무슨 일인가 급히 가보니 아빠를 따라온 여자 아이가 돌돔을 잡았다지 뭐니? 일찍 끝낸 낚시가 아쉽다 보니 몽돌 밭이 끝나는 지점에서 우럭이라도 잡겠다고 어른들이 극성을 떠는 사이에 끊어진 낚싯줄을 주워든 아이가 바늘도 묶어주고 징그러운 지렁이도 끼워주면 고기를 잡겠다고 보채기에, 대충 만들어서 물속에 던져 주고 줄만 잡고 있으라고 했다는데, 큼지막한 돌돔이 물고 늘어졌다지 뭐냐……. 엉뚱한 곳에 돌돔이 있다며 어른들이 아이가 있는 곳으로 몰려 와서 극성을 떨었지만 놀란 돌돔들이 이미, 어디론가 도망을 가버렸을게다. 당연히 고기가 없는 곳이라며 외면을 했을 몽돌 밭에서 고기가 잡혔는데 외지인으로는 최초로 만재도를 밟았을 ‘추자 야인’이 몽돌 밭에서 세 칸짜리 그라스롯드 낚싯대에 성게로 수많은 돌돔을 낚아서 소금에 절여가며 “ 이 아까운 돌돔, 이 아까운 돌돔…….” 하며 한탄을 했다는 80년대에는 냉장고나 발전기도 없었다는 그의 경험담이 생각났다. 가져 온 미역을 본, 마나님이 색깔도 이상하니 누렇게 바란 미역을 가져왔다며 탐탁해하지를 않더니 그냥, 창고에 넣어 두란다. 귀도 달리고 뿌리도 달리고, 이런저런 찌끼들이 붙어 있다 보니 볼품이 없었겠지.......-_-;; 집에 사다 놓은 미역이 떨어진 날, 생각이 났는지 꺼내오라더니 억세게 생긴 것이 오래 끓여야겠다고 딴죽도 한 번 더 걸다간, 한번 떠 먹어보더니 기가 막히게 맛이 있다며 그 섬에 가면 또, 사오라고 했다……. (그래? 당장에 또 낚시를 가야겠군? ^^;;;;;; ) 그나저나, 급히, 약국부터 가봐야겠다....... 잠결에 드러났던 손목부분만을 모기들이 집중 공격을 하여 수백 방을 물어댔는지 아예, 손목이 손목시계가 빠져 나오지가 않을 정도로 퉁퉁, 부어 올랐기에 바를 약을 달라고 하니 한참을 들여다보던 약사가 바르는 약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고 조제약을 먹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피부과를 가야겠단다. 항히스타민 성분이 듬뿍 담겼다는 조제약을 보니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모기한데 물렸다고 약을 먹어야하다니……. 약을 먹자마자 눈에 보일정도로 붓기가 빠져들었으니 참 신기하기도 했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하여 고통을 당하지 않는 것이 우선 책이다 보니 낚시를 간다면 모기약부터 챙기기 시작했다. 국방색 튜브에 담긴 모기약과 잘 듣는다는 기피제를 구하려고 동대문의 벼룩시장을 뒤져가며 배고픈 카츄사가 들고 나왔다는 모기약을 그러모았지만 녹슬고 절반정도만 남은 것들이다 보니 동두천의 양키시장으로 달려가 40년 전통의 평양냉면으로 점심을 하고 파란깡통, 노란깡통에 담긴 모기약을 쓸어 모아와 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는데 이제는 같은 제조사의 이름을 단 국산품도 나왔으니 동두천의 냉면 맛도 잊어버리게 생겼다. 1997년 드디어 만재도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더욱 많은 낚시꾼들이 찾아 들게 되었지만 갑자기 만재도를 다니던 대절선 들이 멈춰서고 말았다. 가거도를 다니는 여객선사에서 낚시손님을 태우면 수입이 더 늘어나겠다는 생각에 낚시 사선들이 다니는 것이 불법이라며 압력을 행사했다는 설이 나돌았는데 진도에서 다니던 배편들이 없어졌으니 만재도를 가려면 할 수 없이 쾌속선을 이용해야만했다. 하루걸러 다니는 여객선을 이용하자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일정도 더 잡아야했지만 배끼리의 높낮이가 심하다 보니, 쾌속선에서 택택이 목선으로 많은 짐을 내리고 올리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보니, 모든 것이 불편하여 만재도 나들이가 점점 뜸해져 갔다. 또 그 때는 서울로 돌아온 후배가 단단히 혼이 났었던지 바다가 무섭다며 바다낚시를 꺼려했는데 산나물을 뜯고, 쏘가리나 잡으러 갈 때만 따라 다니다간, 건강검진을 하러 제 발로 걸어 들어갔던 병원에서 식도에서 생긴 출혈의 쇼크로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되고 말았다. 너와 함께 였기에 항상,즐거웠고, 기쁘고, 고마웠던 추억만 가득, 남겨 놓고……. 참, 어복도 많은 놈이었는데....... 어느 해인가? 가거도를 가려고 팽목항에 도착하니 어둠속에 유령선 같이 쇠사슬에 묶여 있는 배가 보였는데 ‘남해2호’였다. 만재도, 추자도, 태도, 맹골의 물골을 우직하게 넘나들며 애환을 함께했던 배가 어느 섬으론가의 연결선으로 팔려나가 새로운 쓰임을 위하여 기다리느라 오랫동안 묶여 있는 것이라는데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또, 많은 낚시인들이 타고 다녔던 ‘조성 스타호’는 또 어디에 있을까? 완도에 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었고 인천에서 우럭 낚시를 다닌다는 소리가 있었는데 아무려나, 남해2호와 함께 어깨를 같이 했던 격이 있는 몸인데 인천선창으로 팔려와 천하게 함부로 몸을 굴릴 정도까지야 되었겠는지......... 민박집의 개념도 없었고 민박을 하겠다는 집도 없었지만 만재도에도 전기가 들어오자 여객선을 이용해서라도 다니는 손님들이 늘어나다보니 택택이 배라도 있는 집이라면 하나 둘씩 고정 손님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집집마다 방이 몇 개 안되다 보니 여러 집으로 나누어 졌다. 섬마을 공동으로 운영하던 시스템은 없어졌고 원래는 방물장수로 만재도에 들렀다가는 만재도 아낙과 사랑에 빠져서 눌러 앉게 되었다는 이(李)씨가 최초로 민박과 낚싯배를 시작한 집이었는데 점차, 손님이 늘어나고 복잡해지자, 밥도 얻어먹기가 어려워지고 화장실이나 간단하게 씻기도 쉽지가 않게 되었다. 짜증이 난, 선임자가 용기 있게 재청하여 다른 집으로 이주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는데 그 선임자가 선임자 중의 으뜸 선임자인 이(李)씨 어르신이었기에 좁디좁은 섬마을에서 다툼 없는 조용한 이주가 가능했을 것이다.(믿거나, 말거나, 섬의 특성상......) 98년 여름에 민박집을 바꾸고는 가까운 본 섬 부근으로 배를 타고 간 어느 날, 갑작스레 날씨가 사나와져서 배가 오기가 힘들 것 같았다. 항상, 모든 준비가 철저한 편이다 보니 하루 이틀쯤 어느 구석에 내동댕이쳐 진다해도 굶지 않고 살아남을 수가 있도록 준비를 하는 편이었는데 어떤 급박한 상태에서라도 대처할 수 있도록 솔선수범을 보였던 기이한 선임자들을 여럿 만난 행운이 있어 그들의 행동을 눈여겨보며 따라했고 정신교육도 철저히 받은 탓도 있었겠지만 천성도 그러한지, 꾸려놓은 짐을 몇 번씩 싸고 풀기를 수 없이 점검하며 더 넣고 빼내기도 하며 빈틈없이 군장을 꾸리다 보니 몇 년 지나면서 부터는 선임자들이 오히려 쭈삣거리며 다가와선 구급약이나, 접착제, 큰 바늘과 굵은 목줄까지 얻어갔으니 준비라면 이골이 난 편이었다. 또, 바늘 가는데 실 간다고 마나님까지 식량을 허술히 싸서 보내는 편이 아니어서 민물의 댐 낚시를 며칠 간다하면 서너 명이 먹고도 남을 분량의 음식장만을 해주어 급히 뛰쳐나온 사람들과 한 팀이 되어도 불편함이 없다보니 특별한 비책이라도 하나 둘씩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전수해 주었으니 주워듣는 것이라도 많아졌고 좋은 자리를 먼저 차지해도 아무 말이 없으니 마나님 덕도 본 모양이다 ^^;; “이 자리가 수심이 몇 미터고 아무 날 아무 시에 틀림없이 고기가 잡힌다 이거지요? 잉~?” 바다낚시에 주력하면서는 반찬이나 찌개꺼리 같은 것을 싸가지고 다닐 일이 줄어들다보니, 이상한 오해를 받기도 했으니, 원……. “이상하네? 섬에 가서 뭘 먹고 산 다요? 혹시나, 다른 짓을??????” 처음에는 납득을 시키느라 한참 목청을 올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지 “남이 해주는 밥이 더 맛이 있더냐? 섬에 따로, 봐둔 여우가 있느냐, 왜 같은 섬만 계속 다니느냐…….” 별난 딴죽도 걸어오데 그려............-,,- 하긴, 거문도만 다닐 때는 계속 거문도만 다녔고, 추자도를 다닐 때는 또 추자도만 뻔질나게 다녔는데 고기도 점점 줄고 사람들만 늘어나니 자연히, 고기 많고, 사람 적은 섬을 찾아 옮겨가게 되었다. 그 덕에 또, 만재도 외에도 외연도에서도 십여 년간 조용하고 적적한 낚시를 할 수가 있었을 게다만.......... 그나저나 해가 지기 전에 어떻게 민박집으로 돌아 갈 수 있을까? 걱정을 하다 보니 새로운 민박집의 아저씨와 아줌마가 남다른 서비스를 제공하려는지 동내 아줌마 몇을 데리고 산등성이를 넘어왔는데 짐을 나누어 머리에 이고 들더니 낚시가방만 들고 편히들, 따라 오시라기에 뒤를 쫓다보니 부스러져 가는 부스스한 시멘트 계단길이 나타났다. 마치 만리장성을 축소시켜 놓은 듯한 구불구불하고 높고 낮은 계단 길을 오르내리며 몇 번이고 뒤돌아보면서 신기해 하다가 널찍하고 평평한 곳이 나타났는데 녹이 잔뜩 쓸어 삭아 내린 쇠기둥이 보였다. 만재도를 살찌워 주었던 팔뚝만한 전갱이가 많이 잡힐 때였다는데 같이 잡자고 무작정 몰려왔던 흑산도의 어민들이 텐트촌을 형성했던 자리라고 했다. 술집과 색시 촌도 생기고 순진했던 원주민들에게 술과 담배와 향락을 전하며 못된 짓을 하기에 마찰도 생기다 보니 만재도민과의 접촉을 금하고자 몽돌 밭을 건너오지 말라고 금줄도 쳤다고 한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호황이 있었지만 그 많던 전갱이 떼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게 되자 자연히 텐트촌도 없어지게 되었고 그 때 배를 붙들어 매두던 쇠기둥 말뚝만 녹이 쓸어 앙상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영원한 비극인 6.25 사변도 모르고 넘겼다가 자유당 정권 시절에는 군 입대 통지서를 팔도방위나 공익요원이 아닌 순사나리가 들고 찾아다니며 전했다는데 배편이 마땅치가 않던 시절이었으니 목포에서 입영통지서 한 장을 달랑 들고, 얼마 만에나 한 번씩 식량을 싣고 다니는 보급선 수준의 허름한 배를 타고 꿀렁, 껄렁거리면서 열 시간도 넘게 걸려 만재도에 도착하면 순사나리는 이미, 혼절한 상태로 몽돌 밭에서 게거품을 물고 널브러져 있으니 가엾게 여긴 아줌마가 시퍼런 전복죽을 쑤어 숟가락으로 입안에 퍼 넣어주며 속을 달래 주었단다. ‘쯧, 쯧, 여기가 어딘데 이 먼 곳에 먹은 것을 다 게워가며 왔을까~이~?!’ ‘어여, 먹고 정신 차리~소~!’ ‘에고 메, 이제 정신 좀 나네........ 그런데, 여기 이 아무개가 있소~~~?’ ‘이 아무개는 우리 아들인데 왜 찾소?’ ‘군대 가라고 영장이 나와 전달하러 왔.......’ 말이 채 끝나지도 못하게 순사나리의 입을 틀어막고는 손목을 거칠게 잡아채어 집으로 끌고 가더니 푸세식 변소 구텡이에 있는 창고 방으로 밀어 쳐 넣었다. 당연히 나이롱 자루 같은 것이 없었을 때였으니 짚으로 짠 가마니 같은 섶 부대에 가득 담겨있는 돈이라고 불리는 종이들을 보여 주며 담을 수 있는데 까지 호주머니에 가득 담으라하고는 맹수가 포효하듯 낮고 힘 있는 목소리를 울려댔다. ‘ 이 아무개 없어~!!!! 가서 그렇게만 전하면 되어~!!!!’ 순사나리는 터질 듯한 호주머니의 단추를 채워가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고 목포로 돌아가서는 서장나리에게 그런 이름의 인물은 틀림없이 없노라고 씩씩하게 복명 했다고 한다. 살아생전 두 번 다시 갈 곳이 못된다고 고개를 절레였으니 나중에 누가 그 섬을 찾아 영장을 전달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영장을 전달하기위하여 누군가가 만재도를 가야 했는데 후임자에게 다가간 선임 순사나리가 귓속말로 큰 호주머니가 많이 달린 옷을 입고 가라고 조언을 했단다. 얼마 만에 얼굴이 핼쑥해져 돌아온 후임 순사나리의 호주머니는 더욱 부풀어져 있었다는데 어쨌거나 만재도 에서는 나이가 많은 섬주민은 군대를 가지도 않았고, 갈 수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민박집 아저씨가 들려주었는데 꿈결에 들었었나? ^^;;;;;;;; (믿거나, 말거나......) 공유하기 게시글 관리 낚시의 덫 저작자표시 비영리 변경금지 '사진이 담긴 조행기 > 만재-가거-추자-거문-제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재도 外傳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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