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진이 담긴 조행기/서해+남해+동해

가까운 곳에 섬이 있었네....1 (여기였어???)

by 찌매듭 2011. 4. 14.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바다낚시 계에서는 별스런 한 획을 분명하게 그었을지도 모르는 천연기념물(?) 같은

집 근처의 떠버리 낚시점 점주에게서 빨리, 들러달라는 연락이 왔다…….

 

모든 양기가 입으로만 올라가는지 그의 현란한 말솜씨는 많은 꾼들이 알아주는 편이었는데,

낚았다는 고기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마릿수도 늘어날 뿐 아니라 남의 낚시 기법이나 경험담을

자기 것으로 바꾸어내는 재주가 탁월했다. 

 

언젠가 그의 낚시점 버스를 이용하여 태도를 다녀오던 날, 조황이 좋지않아 가라앉은

차안의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꺼내들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우리 일행들이 초대형급 볼락들을 타작하던 날의 이야기였다……. 

우리들이 낚았을 마릿수와 크기까지 더 늘려서는 자기가 직접 낚은 것같이 잘도 꾸며가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 총무님, 크기를 좀 더 줄여야겠어?~~ 마릿수도 너무 많은데?????”

 

“음~? 아~? 그렇구나!~~!!! 여기 주인공이 있었네??! 난 또 내가 잡은 줄로 착각을 했지......

“워낙, 고기를 많이 잡다 보니 내 이야긴지, 남의 이야긴지 헷갈릴 때가 있어서……^^;; ”

 

바다사정을 잘 모르는 서울사람들이 바다낚시를 시작하면서 그의 낚시점에 들어서면

부산 바닷가가 고향이고 어려서부터 바다낚시에 달통했다는 그의 입담에 안 넘어간 사람이

없었는데 처음 들어보는 신비한 바다 이야기와 이름도 생소한 미지의 섬에 가서 낚시를 하면

가져올 수 없을 정도로 고기를 낚을수 있다는 이야기에 꺼뻑, 넘어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가거도라는 섬에 가면 팔짜가 피는 것이 아니라 팔짜급 감성돔이 우글우글하다하고

태도라는 섬에 가면 전복이 바닥에 깔렸다고 뻥을 쳐대니 명인은 아니더라도 요즘, 흔해빠진

허접한 프로들보다는 고수일거라 생각했는지, 바다낚시를 간다는 방만 써 붙이면 버스 한 대

채우기가 어렵지 않았는데, 수도권에서는 우리나라 바다 어디엔가 있다는 그 섬을 찾아 가는

길도 몰랐고 낚시기법도 모르던 때였다 보니 찾아온 손님들은 그가 꼭, 장만해야한다며

권하는 데로 바가지성 물품구매를 해야만 했다.

 

“돌돔 힘이 천하장사니 스웨덴제 아브가르샤 장구통 릴이 아니면 끌어낼 수도 없다” 는 식이었다.

 

 

내가 85년도에, 유주방 선생을 처음 만나 그의 유혹에 넘어가 가거도 에서부터 바다낚시를

시작했는데 섬도 모르고 그 섬을 품고 있는 바다는 더 모르고선 철없이 낚시를 시작했는데

그때만 해도 가거도며, 태도, 만재도를 아는 사람이 드물었고, 90년대 초에 들어와서야

크릴 밑밥이 보급되며 구멍 찌를 사용하는 릴낚시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추자도와

거문도는 가장 먼저 잘, 알려지게된 바다낚시의 메카였다.

 

일본에서부터 유행한 찌낚시의 시작이 먼저 전달되었을 지역의 특성상, 제주도와 부산 쪽이

선두를 달렸으나 제대로 된 출조점이나 전문적인 바다낚시 가이드가 전무했던 서울에서

부산 태생인 낚시점주가 운영하는 낚시점이라 더, 장사가 되었을게다.

.

 

후배가 사무실에서 멀지 않은 뒷골목에 바다낚시 전문점이 생긴 것을 보았다기에

용산에서 선상 우럭낚시를 전문으로 다니는 낚시점과 같은 곳인가 보다 생각하곤,

잊고 있었다가 얼잔 하게 한잔 걸치고 지나가던 길에 못 보았던 낚시점 하나가

눈에 뜨였는데 붓글씨로 ‘태도’ 라고 출조 장소를 써 붙였기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으슥한 뒷골목 속에 자리 잡은 허름한 낚시점에서 원도권중에서도 원도권인, 태도로

낚시를 가겠다고 방을 써 붙인 것도 신기했지만 삼십여 만원씩의 출조비를 들여서 태도까지

낚시를 갈만한 낚시꾼이 이 동내에 얼마나 있을까?

20년 전 삼십만 원이라면 지금으로 견주어본다면 백만 원도 넘는 금액이 아니었을까?

 

경상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낚시 점주와 잠간,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태도라는 섬엘 가면 고기가 너무 많아 잡은 고기를 다 가져올 수도 없을뿐더러

어종도 다양하여 농어며, 참돔이며 미터 급이 많다며 슬슬, 목청을 높이면서

일어나기 시작한 거품이 입 꼬리를 타고 귓가까지 올라가기에 실소를 하고 말았다.......

 

나중에는 한술 더 떠서 가거도 이야기까지 술술 나왔는데 듣다보니 신기한 것이

유 선생님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도 유 선생님에게 바다낚시를 배워 가거도 까지 사선을 수차례 넘어 보았다고 하니

갑자기 목소리가 낮아지며 입을 닫아버리기에 낚시꾼 뻥은 하나님도 인정하는 것이니

'별, 재미있는 사람을 보았구나,' 생각하며 낚시점을 나섰다.

 

 

얼마 후, 사무실에 손님이 찾아왔다…….

 

먼 섬까지 바다낚시를 다닌다는 사람이 있다는 소리를 풍문으로 들었기에 서로가

알만한 사람일게라며 자신의 낚시점, 홍보도 겸하여 들렀다며 호탕한 웃음을 흘리며 들어섰는데

태도를 간다던 그 낚시점의 주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가져온 박카스 박스를 내려놓고는 꽁지가 빠져라, 가버렸다.

(저 사람이 왜 왔을까? 오자마자 가버릴걸 무엇하러 왔을꼬? -_-?)

 

두어 해가 지나자, 집근처의 대로변에 바다낚시점이 생긴 것이 눈에 뜨였는데

초등학교 동창 놈이 주인이라는 소리가 들렸다. 고등학교까지는 자주 본적이 있던

얌전하기만 했던 동창 놈이 의젓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고 주로 군산 권과 거문도로

출조를 한다기에 가끔씩, 드나들게 되었는데 2층에는 선상낚시만을 다닌다는 출조 전문점이

별도로 세를 들어있다 고했다.

 

무엇을 잡아오더냐? 물으니 입낚시 솜씨만 대단하여 매번, 신발짝만한 열기와

허벅지만한 우럭을 많이도 잡아온다는데 한 번도 잡아온 것을 본적이 없으니

뻥이 아니겠느냐고 웃고 있었는데 마침, 출조를 다녀오는지 버스 한 대가 닿더니

쿨러며 스티로폼 박스를 끌어내기 시작했고 멀거니, 보고 있던 우리들 앞에

쿨러 하나를 들고 와서는 자랑스럽게 열어보였는데 정말, 신발짝만 한 크기의

탐스러운 왕열기가 가득했고 으기 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동창 놈에게 큰소리를 쳤다…….

 

“뻥이라고?????? 자, 봐라~!!!! 추자도 왕열기~!!!! 너무 싱싱해서 회를 떠먹어도 될 끼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낯익은 얼굴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예전에 사무실로 찾아왔다 그냥, 

가버린 적이 있는 ‘태도’로 낚시를 간다는 골목 속에 있었던 낚시점의 주인이었다.......

 

그도 나를 알아봤는지 멈칫하다가는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는데 잠시 후에 비닐봉지에

열기 몇 마리를 담아 내려와서는 믿지도 않고 비웃기만 했다는 친구 놈에게는 한 마리도

줄 수가 없지만 같이 유 선생님을 사부로 모셨었던 동문인 나에게만 준다며 혀를 날름, 하고선

다시 올라가 버렸다........

 

 

주로 거문도로 출조를 다니던 동창 놈이 급자기 건강이 나빠지면서 낚시점을 그만 두더니

연락이 끊기었다.......

 

수도권에도 바다낚시 붐이 일면서 손님이 늘어나던 시기였기에 2층에서 선상낚시만을

전문으로 출조하던 낚시점주가 사무실 근처의 대로변에 커다란(그때로서는…….)

낚시점을 내고는 갯바위가 원래, 전문이었다며 수도권을 대표한다는 간판도 내걸었다.......

 

타고난 장사꾼이었는지? 입담이 유별 난건지 수도권의 사람들은 들어본 적도 없는

가거도, 태도, 만재도를 재차 들먹여 가며 손님들의 기를 죽였고 추자도 정도는 가까운

안방거리라며 큰소리를 쳐가며 진도권의 독거도, 관매도, 거차도 같은 곳으로의 무박삼일의

고단한 낚시길이 대부분이었지만 어수룩한(?) 서울사람들 등쳐먹기는 식은 죽 떠먹기였을 게다........ ^^;;

 

병풍도나 맹골도 같은 곳도 간다지만 오가기만 바쁜 당일치기 낚시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거문도나 추자도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여 지나쳐만 다니다가는, 가끔씩 태도나, 만재도를 간다면

낚시점 버스를 이용하기도 했지만 혹시라도 예약했던 손님이 급한 일로 취소를 하는 일이 생겨

빈 좌석이 서넛이라도 생겨 만석을 못 채우게 되면 갑자기 주의보가 떨어졌으니 목숨이 두 개가 아니라면

갈수가 없다며 엄포를 놓으니 멀리서 온 손님들도 할 수 없이 다시 돌아가야했는데 늑대가 나와도

열 번도 넘게, 자주, 등장하다보니 더 이상 써먹을 수도 없게 되었다.......

 

손님들이 먼저 일기예보를 확인했다며 날씨에 이상이 없다고 하면 현지의 배가 고장 났다던가,

선장이 행방불명이 되어 연락이 안 된다는 등, 별 희한한 핑계를 잘도 만들어 둘러댔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서울에서는 바다낚시를 다닌다는 것이 쉽지가 않았는데 채비나

기법에 대한 상식도 없었고 바다를 몰라도 너무나 모르는 손님이 대부분이었다.

 

찌낚시 채비를 자꾸만 잊어버리는지, 찌매듭-반달구슬-구멍찌-원형완충고무-수중찌-티고무-

도래 순서를 종이에 적거나 그려 가지고 다니는 사람이 있어 옆에서 보면서 의아하게 생각했던 것이

그때만 해도 값비싼, 물 건너 온 구멍 찌를 수십 개나 가지고 다니던 사람이기 때문이었는데

알고 보니 점주가 권하는 데로 자꾸만 구입을 했다고 했다……. -_-;;

 

“내가 알게 뭐야? 고기 잡으려면 이런 찌도 있어야하고 저런 찌도 있어야 한다며

 이것사라, 저것사라기에  그냥........ 사다 보니 많아지데??????“

 

나중에 알고 보니 떠버리 낚시점주가 부산이 고향인건 틀림없지만, 찌낚시가 전문이 아니고

장대 낚시가 전문이었는데 어려서부터 낚시를 했다면 당연히 대나무 장대로 시작을 했을 테고

팔뚝만한 굵기의 그라스롯드 장대를 엊그제까지 사용했을 것이 분명한데 하루아침에 구멍찌 낚시의

달인으로 둔갑을 했어도 눈치를 챈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니 정말, 서울사람들이 어수룩하긴 했나보다...

 

낚시점이 잘 돌아가자 낚시를 잘 한다는 같은 부산출신의 젊은 총무를 하나 채용했는데

얼굴을 보니 언젠가 갯바위에서 같이 낚시를 한 적이 있었던 사람으로 옹씨라고 했다.

 

옆에서 보니 채비가 착수하면 물속으로 서서히 잠겨 들었는데 알고 보니 수중 찌를 잘못채워

밸런스가 맞지 않는 잘못된 채비였다.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서울에 올라온 지가 제법되었다며

구멍 찌를 사용하는 낚시는 처음이라고 했었던가???

 

두어해 동안 총무로 있던 옹씨가 어수룩한 서울낚시꾼들을 상대로 출조만 전문으로 해도

밥 먹기는 쉽겠다고 생각했는지 갑자기 독립을 선포하고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낚시 사무실을 차렸는데 그동안 떠버리 낚시 점주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출조를 하기위하여

드나들던 손님의 95%가 하루 아침에 저쪽으로 옮겨가 버렸다…….

 

자기가 뿌린 데로 거둔 꼴이 되었겠지만, 멀지도 않은 곳에 데리고 있던 총무가 출조점을 차리고

손님들이 썰물같이 빠져 나가고 나서야 반성을 했는지 후회를 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부쩍 말수가

줄어버린 떠버리 낚시점주가 측은하기는 했지만 놓친 고기가 다시 돌아와 물어줄 리가 없었는데

한 가닥, 그에게도 희망이 있는 것은 현란한 말솜씨에 넘어갈 초보손님들이 걸려들, 몫만은 좋은 곳에

자리했기 때문일까?

 

“내가 언제고 이럴 줄 알았기에 선장들 연락처나 노하우 같은걸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제깟 놈이 출조가 쉽지가 않을걸?”

 

그의 저주가 걸렸는지 옹씨는 처음에는 기세 좋게 대형버스에 손님들을 가득 싣고 출조를

시작하였지만 운영의 미숙과 술과 노름에 빠져가며 나태함이 드러나면서 곧, 손님들의 불만을

사고 말았는데 현지 선장과 연락도 잘 안되고 때에 맞춘 포인트 선정이나 낚시방법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부산 사람이라고 모두 낚시를 잘하고 아는 것이 아닐텐데, 오죽하면 제 고향을

떠나와, 타지에 와서 그 어렵고 힘든 낚시점의 총무를 하겠노?!

 

이제는 낚시를 어느 정도 깨우치고 바다를 알게된 손님들 대부분이 어딘가로 떠나버렸고

옹씨는 서너명씩 적은 숫자의 초보손님들을 모아 어렵게 출조를 하면서 낚시는 제법 터득하게

되었는지 어느 낚시용품 메이커의 홍보를 하면서 승합차를 몰고 다녔는데 진도에서 마지막으로

본지가 십년도 넘었으니 아직도 낚싯밥을 먹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떠버리 낚시점주가 총무를 겸하며 가이드까지 하던 초기에는 인원을 모집하고 버스를 이용하여

바닷가에 도착하면 대절해 두었던 너절한 배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의

가격을 받으면 부담스러운 수십만 원대의 출조비용이었는데 약간 멀리 떨어진 섬으로 가야만

어수룩한 서울사람들이 알 수도 없기에 드나드는 낚시꾼이 없는 곳만 골라 다니다 보니 별난

만족감에서였는지 군소리들이 없었다.

(아마도 바다 낚시를 가기만 하면 회를 실컷 먹고 반찬을 할 수 있는 고기를 퍼 담아 올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시작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게다.)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주말에는 배를 구하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가며 원도 권까지 가보아도 고기를 잡는다는 보장이 없고 자신의 안전도

생각하게 되었고 1997년에 닥친 IMF 경제위기 탓도 있는지 어느 날 부터는 손님이 부쩍 줄어들다보니

영악했던 그도 우려먹을 만큼 우려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시대에 맞추어 손님들이 부담 없을

근거리로 출조지를 바꾸기 시작한 것이 청산도나 여서도 쪽이었으나 환영을 못 받는 이상한 버릇 때문에

선장들이 거부를 하다 보니 진도 권으로 가야했는데 독거도나 거차도쪽은 조황이 병풍도보다 좋지가 않았다.

 

추자도도 다녔으나 선비를 자주, 떼어먹고, 깎아먹고, 잘라먹다 보니 상추자권에서는 선장들이 모여서

아예, 발도 못딪게 하자고 결의를 하고는 출입금지령까지 내려 버렸다.

 

그것도 모르고 하추자에 좋은 집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기에 다니던 집을 알려 주었더니

결국에는, 또, 본색을 드러내어 선장이 울먹한 소리로 하소연을 해와서 내막을 알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태도, 만재도, 가거도 에서도 같은 수작을 떨어 원성이 자자했다는 것이 아닌가?

 

지난번에 조황이 좋았는데도 다른 곳을 가기에 어째, 이상하다 했더니 선장들의 분이 풀리고

잊을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다시 찾아가는 식이었는데 오랜만이다 보니 사람 좋은 선장이나

섬사람들은 지난 일을 다시 꺼내는 것이 야박하다 생각했는지 그냥 묻어 버리고 말도 꺼내지 않았다.

 

15년도 더 지난 지금도 만재도의 민박집에서 떠버리 낚시점주 이야기만 나오면

민박집 아저씨는 어촌계장 시절에 당했던 몹쓸 기억으로 흥분을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는데

 

“그 썩을 놈이 종선비, 식사비를 주고 간 후에 세어보면 매번, 부족하더라고…….

 내가 몇 번을 물어냈다니까???????? 나중에는 노하우가 생기더라고…….

 남해 2호에 올라타고 돈부터 받아 세어보니 지가 꼼짝 할 수 있어?

 섬사람이라고 우습게 보고 있어........ 썩을 놈이......“

 

 

탐라의 관탈도로 돌돔 원투 낚시를 다니면서 케블러 줄을 편직기(요꼬) 바늘로 매는 방법을

배워왔기에 떠버리 총무 앞에서 시연을 해보여 준적이 있었는데 가게를 지키며 이리저리

 만져볼 시간이 많은 그가 새로 개발을 했다며 약간 변형된 채비방법을 보여주었는데 이 또한

탐라에서는 진작부터 사용하던 방법이었지만 돌돔은 커녕, 탐라도 가본적도 없는 그가 탐라에서

생겨났을 바늘매는 법을 아예, 자기가 처음부터 창안해낸 것이라며 돌돔바늘을 묶어 

봉지에 담아 팔기 시작한 것이 요즘 낚시점에서 파는 돌돔바늘묶음이 봉지에 담긴 것과 비슷했는데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 했으니........ ^^;;

 

서둘러 달려 가보니 한가한 낚시점을 지키는 그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는지,

불경기의 여파 탓인지, 부쩍, 말수가 줄었다…….

 

동글동글한, 처음 보는 얼굴…….

분명히 바닷바람에 그을었을 피부, 뱃사람일까????

 

안면도 부근의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조용한 등잔 밑의 작은 섬을 하나 꾀어 차고

낡았지만 작은 버스도 한 대 샀고, 배까지 한척 마련했기에 용돈벌이라도 해보려고

홍보 차 낚시점에 들렀다고 했다........

 

그 작은 섬에는 농어와 우럭이 득시글할 뿐만 아니라, 섬에 있는 해녀들이 확인했다는

허여~ 멀건 한, 도미와(감성돔을 말하는 듯,) 온몸에 꺼먼 줄이 얼룩덜룩한 열대어 같은

줄 돔도 지천이라며 귀가 솔깃한 말만 늘어놓는데 사람의 생김새도 순박한듯하니

동기가 부여되면 실천해 보는 것도 좋지 않겠어? ^^;;

 

기상예보를 확인하고 바로 좋은날을 골라 놓고, 가끔씩 낚시를 가는 욕심 많은

친구 한 놈을 불러내었고, 돌돔낚시에 있어서만큼은 우리나라 최고~! 최강~! 무적~!

제일의 낚시인으로 인정하는 이시다이(돌돔) 朴의 수제자 강 씨와 신 기법을 시도하는

엔지니어 최 씨까지 한자리에 모였다.

 

꽃박람회가 열렸던 안면도 부근에 있다는 미지의 섬을 향하여 달려가 보니

어느 조각과 교수님이 우럭이 지천이라며 거품을 물어대는 꼬드김에 빠져

언젠가 한번, 가보았던 곳이 아니겠어?

 

물이 빠진 간조 시간이 걸리면 방파제의 끝까지 짐을 옮긴다는 것이 보통 힘든 곳이 아니었던.……. 

 

 

서울에서 안경점을 하던 교수의 친구가 안면도 구경에 나섰다가는 공기 좋고

살기 좋은 곳이라며 아예 안경점까지 안면도로 옮겼다는데 편하게 잠자기에는

아주 좋은 곳이기에 안면도(安眠島) 라는 지명이 생겼겠지만 안면도의

읍내라는 곳이라 봐야 바닥이 한정되어있는 좁은 곳이다 보니 서울 살 이를

했던 사람이 온 동내를 쏘다니다간, 바닷가 친구도 사귀었나본데

바다구경을 자주하다 보니 오가다 주워들은 풍월로 팔뚝만한 우럭이 잡히는 철이기에

교수님을 초청했다는데 평소에 잘 알다보니 함께 동행해달라는 부인의 청을 거절하질 못했다.

 

월드컵이 한창이었던, 2002년의 6월의 어느 날이었는데 마침, 도착한 시간이

간조 때였기에 끝도 보이지 않는 방파제 끝까지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야만

배를 탈수가 있었는데 사람을 초청해 놓고도 손수레 한 대도 준비를 안 해놨다고 투덜거렸지만

고기가 많이 낚인다니 이정도의 고생쯤이야……. -_-;;

 

선상우럭낚시를 하려는 사람들이 몰리는 조금 때였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탄

여러 척의 배들이 경쟁을 하듯이 달려 나갔는데 바로 앞에 있는 내파수도라는 곳은 섬 주민들이

외지인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공화국이기에 그 섬을 지나쳐 외파수도 라는 섬 부근에서

손바닥만 한 우럭, 몇 마리 낚고서는 그만, 짜증이 나서 채비를 걷어놓고 멀리 보이는 외연도를

쳐다보고만 있었던 생각이 난다…….

 

안내를 한다고 함께 배를 타고 나갔던 동내 이장이란 사람이 낚싯대를 접어놓고

낚시자체를 포기한 시큰둥한 내 모습을 보고는

 

"낚시는 안하고 무얼 그리 바라만 보시는 교?"

 

"아~?! 우럭이 대~빵~!!!!!! 크다더니만 젖 우럭만 나오기에 저 멀리 보이는

외연도와 화사도를 쳐다보고 있는 중이외다......“

 

"화사도와 외연도를 어찌 아시는 교?"

 

"농어, 참돔, 광어와, 대빵, 큰, 우럭을 낚으러 다니는 곳입죠.......“

 

안면도에서 반백년을 넘게 살았어도 외연도는커녕, 화사도도 가보지 못했다는 이장님…….

다급히, 고개를 돌려버리십니다. 그려.........

 

미련을 버리지 못한 교수와 그 친구 분들은 열심히 낚시를 했기에

손바닥만 한 우럭이나마 십여 마리씩, 낚았기에 선장이 팔을 걷고 나서서는

한 마리에서 두어 점씩의 살점을 얻어내어 이슬을 흩뿌릴 수 있었고

매운탕에 점심밥도 한술 뜰 수가 있었으니 그저, 맑은 바다공기나

들이키고 가는 것에 만족할밖에.......

 

교수에게는 다시는 이런 곳에 불러주지 맙시사고, 정중하고 간곡하게 부탁하고

돌아섰던 생각이 나는데 내가, 어쩌다가 이곳을 다시 오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