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년 4월 왜장 사야가는 조선에 투항,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에 저항해 전쟁에 참가.
선조로부터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성명을 받고 경북 우록동에 뿌리를 내렸다.
“임진년 4월 일본국 우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삼가 목욕재계하고
머리 숙여 조선국 절도사 합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지금 제가 귀화하려 함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오, 힘이 모자라서도 아니며
용기가 없어서도 아니고 무기가 날카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저의 병사와 무기의 튼튼함은 백만의 군사를 당할 수 있고 계획의 치밀함은
천길의 성곽을 무너뜨릴 만합니다. 아직 한번의 싸움도 없었고 승부가 없었으니
어찌 강약에 못 이겨서 화(和)를 청하는 것이겠습니까. 다만 저의 소원은
예의의 나라에서 성인의 백성이 되고자 할 뿐입니다(…)”
왜장 사야가(沙也可).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우선봉장으로 군졸 삼천과 함께 동래성으로 상륙.
그리고 다음날로 조선에 투항. ‘명분 없는 전쟁은 불가’라 했다. 그리고 곧장
조선군과 함께 일본군에 대항해 전쟁에 참가. 조선 왕실에서
김충선(金忠善)이라는 성과 이름을 내림. 현재 전국에 17대까지 대략 2000세대,
7000여명 후손이 있다. 주요 후손 김치열 전 내무부장관, 김재기 전 수원지검장.
400년 전 전쟁에 반대하며 조국을 등졌던 청년 장수의 믿기지 않은 이야기.
대구에서 남쪽 달성군 가창면으로 가는 911번 도로.
경북 시민들이 즐겨 찾는 주말 휴양지로 가는 길이다.
수성못 오거리를 지나 달성군으로 넘어가면 곧바로 자연공원이 있다.
팔조령에서 흐르는 물이 맑고 시원해 냉천자연원이라 부른다.
숲이 우거지고 절벽, 폭포 등 자연경관과 어린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시설이
조화를 이룬 가족공원이다. 공원 위편에는 댐이 가둬놓은 호수가 있다.
선조가 김충선(金忠善·1571~1642)이라는 성명을 내려준 사야가 장군 집성촌은
냉천에서 8㎞ 들어간 우록동(友鹿洞)에 있다.
“조선 문물을 흠모해 귀화한 할아버지는 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삼란공신’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모하당(慕夏堂)이라는 호는 성리학적인 질서를 흠모하며 지었다.
조선에게는 대충신이요, 일본에게는 천하 반역자일게다.
투항한 사야가는 일본군을 상대로 의병, 관군과 함께 78회 전투에서 승전했다.
선조는 그의 성인 모래(‘沙’)에서 나오는 금(金)과 바다 건너 온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합쳐
김해(金海)를 본관으로 정해줬다. 왕이 내린 본관이라 해서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 부른다.
김충선은 진주목사 장춘점의 딸과 결혼했다.
그리고 조정에서 내린 벼슬과 논밭을 “당연히 신하로서 할 도리”라며 마다하고
산수 좋은 달성땅에 내려와 거처를 우록동(友鹿洞)이라 칭하고 사슴과 벗하며
학문에 열중하다 죽었다. 사후 유림에서 조정에 소를 올려 그 무덤 아래에
녹동서원과 사당을 짓고 그를 추모했다. 서원 대문에는 향양문(向陽門)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뒤편에는 사당 녹동사(鹿洞祠)가 서 있다.
뜰에는 모하공김공유적비(慕夏公金公 遺蹟碑)가 영산홍, 수국, 모란, 향나무, 무궁화 사이에 서 있다.
김충선의 글을 모은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에 따르면
그는 “걸음이 나는 듯하고 수염이 멋있고 키크고 활동적”이었다.
그리고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이야기는 그게 전부다.
그가 일본에서 나올 때 갖고 있던 호적에는
아버지가 益(익), 조부가 沃國(옥국), 증조부가 ?(옥)이라고 기록돼 있다.
또 8형제의 막내요, 부인 2명을 두고 왔다고만 말했을 뿐,
가문 내력은 죽을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일본쪽에도 아무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천하의 반역자, 멸문지화를 당하고 남았을 것이다.
1915년 모하당문집이 재간되자 일본학자들은
“이와 같은 매국노가 동포 중에 있는 사실을 믿는 이가 있는 것은
유감의 극”이라고 할 만큼 증오의 대상이 됐다.
“조선이 꾸민 조작극”이라는 말까지 나왔고 이런 분위기는 1960년대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일본에서 국부로 추앙받는 소설가 시바 료타로가 우록동을 방문해
책을 쓰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었다. 1992년 임진왜란 및 김충선공 귀화 400주년 기념제가
녹동서원에서 열렸다. ‘천하의 매국노’가 그곳에서 위대한 평화론자로 부활한다.
NHK방송은 ‘출병에 대의 없다-풍신수길을 배반한 사나이 사야가’라는 다큐멘타리를 내보냈다.
사야가의 일본 후손을 찾는 노력이 이어졌지만 아직 확실한 소식은 없다.
“찾았다”는 소식에 후손들이 직접 일본을 찾아갔지만 증거가 없다.
그렇게 일본의 흔적은 하얗게 사라졌다.
우록동은 후손들이 일궈낸 논밭으로 온통 녹색이다.
서원 윗편으로는 김씨 문중이 개발을 금지하고 있다. 서원 옆에 기념관이 서 있다.
한국과 일본 두 나라를 아우르는 훌륭한 역사교육현장이다.
뒷산에 있는 장군 묘에는 무덤이 3기 있다. 하나는 장군, 하나는 그 부인.
오른쪽 끝 무덤은 뭔지 모른다.
“분명 유품이 함께 부장돼 있으리라 싶은데 시조 묘라 망설이고 있다”고 한다.
*우록동과 김충선에 관한 정보는 www.sayaga.net에서 볼 수 있다.
김충선과 조총
1590년 일본국 사자 히라요시(平義智)가 선조에게 조총 한 대를 진상했지만
조정에서는 코웃음을 쳤다. 2년 뒤 그 코웃음친 무기를 마구 쏴대는 왜군에 쫓겨
선조는 빗속에 파주땅으로 야반도주하는 운명이 됐다. 당시 조선군 무기체계는 어떠했나.
유명한 행주산성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은 창도 활도 칼도 아니었다.
바로 아녀자들이 행주치마로 날랐던 짱돌들이었다.
임란 초기 육전에서 조선군이 형편없이 패퇴를 거듭한 것은 바로 무기체계 차이 탓이었다.
돌을 동원해야 할 정도로 원시적인 무기와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조총(鳥銃)이라는
첨단 살상기계는 애초부터 싸움이 안됐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조선 육군 손에 조총이 쥐어지며 육전 전세는 바뀌게 된다.
학계에서는 임란 이듬해(1593) 이순신 장군이 조총을 만들어 퍼뜨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모하당문집에는 아래와 같은 편지가 들어 있다.
“소장이 귀화한 이후에 본국의 병기를 둘러볼 때 비록 칼과 창과 도끼와 활이 있기는 하나
직접 전투에 당해서는 쓸만한 무기가 거의 없으니 개탄할 일입니다.
둔한 무기로 싸우는 것은 자기 군사를 적에게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소장이 화포와 조총 만드는 법을 알고 있으니 이 기술을 군중에 널리 가르쳐
전투에 쓴다면 어떤 싸움엔들 이기지 못하리까?”
귀화를 선언한 직후 김충선이 절도사에게 보낸 서신이다.
“…하문하옵신 조총과 화포와 화약 만드는 법은
전번에 조정에서 내린 공문에 의하여 벌써 각진에 가르치고 있는 중이옵니다.
바라옵건대 총과 화약을 대량으로 만들어서 기어코 적병을 전멸시키기를 밤낮으로 축원하옵니다.”
이순신 장군이 보낸 서신에 대한 답신이다.
그래서 신식병기로 무장한 육군이 탄생해 임란은 물론 재란, 병자호란에 투입됐다.
김충선에 대한 이야기는 1998년 한일 양국 교과서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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