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294호 지정 된 이 나무는 약 6백 년 전 마을 앞을 흐르는
석간천 상류에서 홍수를 타고 떠내려 오던 어린 소나무를 지나가던 과객이 건져 심었다고 한다.
나무높이 10m, 가슴높이 둘레가 4m, 나무 가지의 폭은 동서 32m, 남북이 22m에 이른다.
이 나무가 석송령으로 불리게 된 연유는 이 마을에 살고 있던 이수목이란 사람이
영험이 있는 나무란 뜻으로 석송령(石松靈)이라 이름을 지었기 때문이다.
자식이 없었던 그는 자기 소유의 토지 6.600㎡를 상속 등기해 주어
이때부터 이 나무는 황목근과 함께 토지를 가진 부자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나무의 보호 관리를 위해 석송계를 조직하고 매년 정월 보름을 기하여
마을의 번영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1985년에는 대통령이 직접 5백 만원의 특별관리비를 보내 주었는데
주민들은 석송령 장학회를 구성, 지역 중. 고등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석송령 애호사상 선양에 힘쓰고 있다.
예천군에서는 이 석송령을 군의 상징목으로 선정하여 활용하고 있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새 도읍지에 궁궐을 신축함으로서 우량한 재질의 소나무는 대량으로 벌채되고
왜구에 대처하는 해군력 강화를 위하여 배를 만드는데 많은 소나무가 필요하고
소나무재에 대한 급속한 수요창출로 공급이 부족함으로서
이조 초기에는 강력한 소나무보호정책이 세워졌다.
조선조의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송목금벌(松木禁伐)이라는 조항으로서
소나무의 벌채를 규제하고 있었고 어기면 장 백대를 때린다 하였다.
세종 때는 우량소나무가 분포하는 지역의 보호를 위하여 땔나무, 화전 등을 금지한
금산(禁山)지역을 전국에 200여 곳 정하고 장부에 기록하여 엄하게 규제하였다 한다.
세조 때에는 군선에 쓸 나무가 부족하므로 관가나 양반의 집도
우량소나무의 사용을 자제하도록 하였고 서민의 집은 아예 잡목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조의 소나무 보호정책은 군선의 제조기법이 낙후되어 수명이 너무 짧고,
화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으며 송정(松政)의 비효율성 등으로
조선 말기에 오면서 우리나라의 우량소나무는 차츰 고갈되었다.
이는 오늘날 일부 산간 지방과 잘 보호된 지역의 소나무를 제외하면
꼬불꼬불하게 자라는 볼품 없는 나무로 전락하는 원인이 되었다.
소나무에 대한 조선시대의 건축재 사용제한은 주요 사찰의 건축재가
무량사 극락전의 기둥의 예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전나무와 느티나무 및
상수리나무 등의 잡목을 사용하게 된 것 같다.
소나무에는 예부터 불리워져 오는 이름이 여러 가지가 있고
학술적으로도 몇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흔히 보는 소나무는 한자로는 나무줄기가 붉다고 하여 적송(赤松) 혹은
주로 내륙지방에 자란다고 하여 육송(陸松)으로 적는다.
소나무에는 적송, 육송, 강송, 춘양목이라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적송과 육송은 소나무를 한자로 쓸 때 표기하는 말이고
강송은 태백산맥 일대에 자라는 형질이 우수한 소나무, 즉 일반인들이 말하는
춘양목을 일반 소나무와 구별하여 붙인 학술적인 이름이다.
따라서 춘양목과 강송은 같은 나무이며 금강산까지 자라는 나무이므로
강송이라는 이름이 더 격에 어울린다.
소나무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애환을 같이 해온 나무답게 이름난 나무가 많다.
속리산 법주사 입구의 정이품송과 등기된 자기 땅을 가지고 세금까지 내는 경북 예천의 석송령(石松靈)이다.
우아하고 기품있는 소나무라면 경남 합천군 묘산면에는 천연기념물 289호 구룡목(龜龍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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