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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o My Life~!/글 담기

서삼릉 나들이-기묘사화

by 찌매듭 2014. 7. 10.

 

새로 장만한, 예전보다 복잡하고 낯선 기계에 익숙해지기 위하여

, 그냥 머리를 식히기 위해 조용한 곳을 찾아 나선 곳이

경기도 고양시에 소재한 사적 200호인 서삼릉이었다.

 

근처식당에서 점심도 먹었겠다. 소화도 시키고 운동 삼아

혼자 사색하며 거닐다 올 생각이었지만 입구에는

상주하는 해설사가 있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었는데

매일 10시 반, 2시에 있고, 지정 시간 외에도

여러 명이 요청하면 안내를 받을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마침, 안내를 원하는 다른 사람들도 몇 있었기에

지금, 안내가 되는 가고 물었더니 잠시만 기다리라면서 곧 해설사가 나왔다.

 

서삼릉에는 조선조 11대왕인 중종의 둘째 왕비인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禧陵)

철종과 그의 왕비 철인왕후가 안장된 예릉(睿陵), 그리고

사도세자와 정조의 어린 아들들의 묘원이 있다.

 

연산 군을 내쫓은 반정공신들은 중종비인 단경왕후를 폐위했다.

이어 중종비가 된 장경왕후는 법도에 밝고 인품이 인자해서

숙의(淑儀)로 궁에 들어 왔다가 왕후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공신들에게 내색은 못했지만 첫 왕비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 때문이었는지 중종은 정치적 개입으로 왕후가 된

장경왕후에게는 부러 냉대를 했지만 왕후는 한 번도

섭섭함을 내비치지 않으며 웃어른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자애롭게 감쌌다고 한다.

그러나 훗날 인종이 될 왕자를 낳고 6일 만에

산후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자 중종이 후회와 미안함에 단명하고 불행했던

장경왕후의 후덕함을 기리면서 능을 성대히 축조하도록 하고

후에 자신도 장경왕후 곁에 묻히겠다고 해서 중종의 묘도

희릉 옆에 건조되었으나 악독하다고 전해져 오는

계비 문정왕후가 강제로 선릉으로 이장하게 했다고 한다.

 

학창시절에 반강제적으로 외워야했던

, , , , , , ,~~~~’ 조선왕조의 왕 이름들이

대충 기억은 난다만, 문화 해설사와 함께 한,

장경왕후의 애사와 함께, 조선 왕릉의 구조와

각 부분의 명칭과 용도, 제사의 절차 등도 상세하게 들어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는데 희릉에서만 한 시간 가까이 안내를 받았고

예릉까지 동행해서 철종과 그 왕비의 슬픈 사연도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지나쳐 다니면서 보던 문화재도 사연을 알아야만 귀한 나의 문화재가 된다.

 

 

중종(中宗)

조선 제11대 왕(1488~1544, 재위 1506~1544). 이름은 역()이고 자는 낙천(樂天)이다.

혁신 정치를 기도하였으나 훈구파의 원한으로 실패하고 1519년 기묘사화를 초래하였다.

 

 

(기묘사화   己卯士禍 )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사건.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폐정을 개혁하고 성균관을 중수하였으며,

두 차례의 사화로 희생된 사람들을 신원(伸寃)하고, 명망 있는 신진 사림파를 등용하였다.

중종의 지지를 얻은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은, 성리학에 의거한 이상정치 실현을 목적으로

먼저 중종에게 철인군주주의(哲人君主主義) 이론을 가르치면서, 군자를 중용하고

소인(小人)을 멀리할 것을 역설하였다. 나라의 미풍양속을 기르기 위하여 미신타파와

향약(鄕約)실시를 강행하고, 유익한 서적을 국가에서 간행 ·반포하게 하였으며,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여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도록 하였다. 현량과는 성품, 기국,

재능, 학식, 행실과 행적, 지조, 생활 태도와 현실 대응 의식 등 7가지 항목을 종합하여 

인재를 천거하고 그들을 궁궐 뜰에 모아 왕이 참석한 자리에서 대책(對策)으로 시험보고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으로 과거의 별시로 치러졌다. 이를 통해 28명의 신진 사림들이 등용되었다.

그러나 뜻을 달리하는 문인의 사장(詞章)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오직 도학사상만을 강조하였고,

특히 훈구파를 소인으로 지목하여 철저히 배척하며, 현실을 무시하고 급진 정책을 시행하는 등

지나친 이상주의를 펼쳤다.

 

중종반정 공신 117명 가운데 76명은 뚜렷한 공로 없이 공훈을 남수(濫授)하였으니

이들을 공신에서 삭제하여 작위를 삭탈하고 그들의 전답과 노비 등도 모두 국가에

귀속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사건을 야기시켰다. 훈구파의 전횡에 시달린

백성들은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에 환영하였지만 중종은 임금의 권위마저

압박해오는 것으로 받아들여 조광조와 신진 사류들을 경계하게 되었다.

신진 사류와의 알력과 반목이 날로 커져가는 가운데 정면 도전을 받은 훈구파는,

홍경주의 딸이 중종의 후궁인 것을 이용하여, 궁중 동산의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의 4자를 쓴 뒤, 이것을 벌레가 갉아먹어 글자 모양이 나타나자,

그 잎을 왕에게 보여 왕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였다. ‘走 ·肖’ 2자를 합치면 조(趙)자가 되기 때문에,

주초위왕은 곧 “조(趙)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었다. 남곤 ·심정(沈貞) ·홍경주 등 훈구파의 사주도 있었지만,

중종은 점차 신진 사류의 급진적 ·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위훈삭제 사건이 중종반정을 반역사건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고

중종은 결국 조광조와 신진사류를 몰아내었다.

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가서 한달만에 사사되고, 김정(金淨) ·기준 ·한충 ·김식 등은

귀양갔다가 사형되었다. 김구 등 수십명도 역시 유배되고, 이들을 두둔한 김안국(金安國) ·

김정국(金正國) 등은 파직되었다. 사림파의 몰락으로 현량과는 폐지되었고 공신에서

삭탈된 훈구파들은 모두 복훈되어 빼앗겼던 재산을 모두 되찾았다.

후일 이때 희생된 사람들을 기묘명현(己卯名賢)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지만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조광조가 성급했다고 비판하였다.